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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구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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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닭을 죽이지 말자'. 지난해 6월 출간된 경영 관련 번역서의 제목이다. 닭은 무리 중 한 마리가 조금 피를 흘리고 있으면 다 덤벼들어 상처난 부위를 쪼아댄다고 한다. 저자(케빈 왕)는 회사 내부에서 흔히 벌어지는 분위기를 닭의 잔혹한 습성에 빗대 우화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조류독감의 여파로 양계.치킨 업계가 상처 난 닭처럼 '왕따'당하고 있다. 과학적 증거가 희박한 '사람 간 감염 가능성'도 퍼지면서 닭고기 소비가 팍 줄었다. 국내 굴지의 양계업체가 부도났고 동네 치킨집의 시름도 깊어 간다. 지구촌 곳곳으로 공포감이 확산하는 상황이다. 인간과 닭의 관계가 이렇게 멀어진 적도 없는 것 같다.

닭이 가축이 된 것은 4천여년 전. 조류 중 가장 먼저 가금화(家禽化)했다. 기원전 2천5백년 인더스강 유역에서 닭을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정글을 누비던 들닭(野鷄)이 인간의 품에 들어온 것이다. 모든 닭의 고향은 아시아 남부 지역이다. 적색. 회색.실론.녹색 야계 등 네종류가 이들의 조상이다. 이중 인도.말레이.미얀마 등지에 살던 적색야계가 집닭의 조상이라고 진화론자 찰스 다윈은 주장했다. 적색야계의 한 갈래는 페르시아를 통해 지중해 연안.유럽으로 퍼졌다. 다른 갈래는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양계가 이뤄진 시점은 정확하지 않지만 중국이 기원전 1천7백년이므로 대충 짐작은 할 수 있다.

인류는 처음에 계란이나 고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락.애완용이나 종교적 목적으로 닭을 길렀다. 무려 3천년 전 투계(鬪鷄)가 있었다는 문헌이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수탉을 새벽을 밝히는 성조(聖鳥)로 여겼다. 우리에게도 신라 박혁거세 및 김알지의 탄생 신화에서 보듯 새 시대와 빛의 전령이었다. 이육사 역시 '광야'에서 '어디 닭우는 소리(암흑시대의 종말) 들렸으냐'라고 읖조리지 않았던가.

인간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닭은 조류 중에서 가장 안전한 가축이다. 매주 날짜를 정해 닭고기를 먹자는 '치킨 데이' 운동을 벌여야 할 만큼 닭이 홀대받을 이유는 아직까지 없다. 막연한 공포 때문에 엊그제도 장사가 안돼 고민하던 통닭집 아저씨가 목숨을 끊었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