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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웰빙] 장금이는 저리 가라 … 맛깔스러운 졸업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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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혜연이랑 상은이, 애린이는 큰 상을 차렸습니다. 교자상을 펼치고 깨끗하게 닦은 유기그릇에 음식을 하나 둘 담아 올립니다. 신선로.수삼냉채.전복초.대하찜 등 상에 오르는 음식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상을 차리는 손놀림도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상차림을 끝내고 손등으로 이마에 땀을 훔치는 혜연이에게 웬 상이냐고 물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작품전에 내는 주안상이란 답을 들었습니다. 그날 오후 5시부터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는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의 색다른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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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예정 시간보다 네시간 앞선 오후 1시. 졸업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컨벤션센터로 들어온다. 교복 상의 대신 앞치마를 두른 조리복으로 갈아입고 작품 전시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현장에서 직접 요리를 하진 않지만 상 차리는 게 제법이다. 얼핏 보면 경력이 꽤 된 조리장으로 착각할 정도다. 두세명씩 팀을 이뤄 1백23명의 졸업생이 46가지 작품을 내놓았다. 전시 작품은 한.중.일.양식은 물론 디저트.케이크.사찰음식에 이르기까지 음식 장르를 망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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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이에게 계속 물었습니다. 왜 하필 주안상이냐고. 혜연이 대신 애린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답을 합니다. "우선 우리 전통 요리로 3년 동안 배운 것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주안상에 들어가는 요리는 첩(반찬) 하나하나가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훌륭한 일품요리랍니다." 상은이가 가세합니다. "앞으로 한국 전통요리를 알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둘 다 자신감이 넘쳐 보입니다.

대학 진학은 했는지, 취업은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혜연이는 서울여대, 상은이는 덕성여대로 진학해 식품영영학을 전공한답니다. 혜연이는 조리학과 교수, 상은이는 파티 플래너가 꿈이랍니다. 애린이는 다음달 미국으로 떠납니다. 외식경영학을 전공해 외식산업체의 전문경영인이 되겠답니다.

열심히 떡과 한과를 만지고 있는 남학생 옆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투실투실한 몸에 마음도 넉넉해 보이는 영민입니다. 장래 희망은 한식 디저트 분야의 최고기술자가 되는 게 꿈이랍니다. 한식 디저트라면 한과.전통차.떡 등을 말합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접어두고 취업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 제가 좋아하는 떡을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대학이 없습니다. 우선 기술부터 배우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늦게라도 대학에 진학할 겁니다." 퍽 어른스럽게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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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조리과학고를 졸업하는 학생은 모두 1백23명. 그 가운데 77명이 식품조리학과.외식조리학과.식품영양학과.식품가공학과 등 관련학과 대학으로 진학했다. 5명은 미국.일본으로 해외유학을 떠났거나 준비 중이다. 조리사로 취업해 바로 외식산업 전선으로 나선 졸업생은 37명이다.

이처럼 다른 실업고등학교에 비해 뛰어난 진학.취업률을 보이는 것은 우수한 신입생의 선발과 실기 위주의 적성 교육이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학교 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김성호 교감에 따르면 목적 의식이 분명한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3회 졸업생을 배출한 현재까지 학생 사고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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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시간이 가까워오자 졸업생들은 조리복 차림으로 자신의 작품 뒤에 축하객을 맞습니다. 혜연이 엄마 최강숙씨의 눈에는 작은 이슬이 고였습니다. "조리고 진학을 위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겠다는 아이를 달래도 봤지만 결국 지고 말았지요. 학교가 멀어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던 혜연이도 기특하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돌봐주신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른 학부모나 친척들도 학생들의 학업 결실이 무척 대견한 모양입니다. "혜선아, 이거 정말 니가 만든 거 맞니. 솜씨가 제법인데." "아빠, 이리 와 봐요. 여기 형이 만든 돼지새끼(애저) 요리가 있어요."

한 시간가량 걸린 졸업식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축하 만찬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선생님과 제자, 학부모와 가족 등 8백여명이 참가했습니다. 오랜만에 특급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가족들의 얼굴이 무척 밝습니다. "밀가루 난리를 치는 졸업식장이 아니라 진정한 축하와 격려의 자리라 너무 좋습니다." 졸업식에 참가한 학부모들의 한결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글=유지상 기자<yjsang@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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