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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골목길과 사랑에 빠진 여자 아이란

중앙일보

입력

중국은 지금 바쁘다. 2008년에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거리를 새롭게 단장하고 후미진 공간들을 깨끗이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오백 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북경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후통길(胡同:골목길)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있다. 골목길이 사라져가는 풍경과 그 심정은 언제나 그렇듯 이중적이다. 중국의 후통길을 카메라에 담는 아이란(박애란, 27세)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WH 한국인인 걸로 알고 있는데 중국을 오가며 사진 활동을 하는 게 이색적입니다. 간단히 소개를 부탁할게요.
박애란(이하 박) - 어려서부터 중국문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서울예대에서 사진을 전공했는데 그때는 차이나타운으로 출퇴근을 하다시피 했죠. 신기하게도 자꾸 중국과 인연이 닿네요. 지금은 북경에서 기획사를 하는 선배를 도우면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에요. 중국에 드나들기 시작한지 햇수로 벌써 5년째네요. 마음만 먹으면 자금성이든, 이화원이든 원하는 곳으로 언제는 산책을 나가고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너무 즐거워요. 사람하고 연애할 때도 작은 인연이 자꾸 쌓이면 운명이 되잖아요. 중국과 제 인연이 딱 그런 것 같아요.

WH 왜 그렇게 중국이 좋으세요?
제가 바꿔서 질문해볼까요? 사람들은 왜 그토록 유럽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찾는 이유는 한 가지로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죠. 대부분 ‘그냥 끌리니까’라고 답하지 않을까요? 저한테 중국이 그런 공간이에요. 사람도 많고 사연도 많은 아름다운 곳 그래서 갈수록 더욱 끌리는 별천지가 바로 중국이죠.
그렇다고 백퍼센트 다 좋은 것만은 아니랍니다. 양면성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잖아요. 생활하다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경우도 있어요. 중국이 무서운 잠재능력을 가진 대국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 해도 불합리한 생활방식들이 있거든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때는 그런 모습도 순박하게 느껴지지만, 실상 그 모습이 순박하게 느껴졌다가도 실상 내가 피해를 입고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느끼는 모습도 비슷해요. 다르게 말하면 타지에 나가서 느끼는 당황스러움 같은 것들이죠. 이를 테면, 불량한 택시기사를 만나 바가지를 옴팡 썼다거나, 집주인이 말도 안 되는 억지와 횡포를 부려 돈을 뜯긴다거나…. 그럴 때 속상한 건 이루 말로 다 못하죠. 집 떠나면 다 고생하는 거죠. 중국이 좀 더 유별나게 느껴지는 면이 있기도 하고요. 제가 옳은 주장을 하더라도 자국민인이나 중국정부 방침이 최우선이니까요. 그러니 중국에서 탈 없이 잘 지내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WH 중국의 어떤 모습을 카메라에 담나요? 부정적인 경험들이 사진에 영향을 끼치진 않나요?
- 결코 그렇지는 않아요. 중국 생활이 실망을 안겨줄 때도 있지만 피사체를 향한 제 애정은 변함이 없어요. 타향살이가 어렵다고 중국이 싫어지진 않았어요. 고목 같은 사연이 왕조의 유적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자금성의 매력을 늘어놓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해요. 특히 저는 서민들의 삶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후통을 찍을 때마다 늘 흥분이 되기도 하고 묘한 심정에 사로잡혀요. 서울 태생이라 시골에 대한 별다른 향수나 기억이 없는데 어쩐지 중국의 후통들이 제 영혼의 고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져요. 중국정부에서 후통 말살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북경의 오래된 후통들이 사라져가는 게 안타깝고 또 속상하죠. 거리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걸 이곳에서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제가 다니는 어학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허름한 식당가가 있었는데 늘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군침 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훈훈한 곳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까 그 자취가 몽땅 사라졌더라고요. 이게 꿈인가 싶어서 몇 번이고 눈을 비볐어요. 국가 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후통 주민들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봤을 때 이러한 현상은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은데 아직까진 별 움직임이 없어 보이네요.

WH 어떻게 해서 후통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저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국 유학생들이 후통이 사라져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해요.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올려놓은 후통 철거 현장 사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어요. 허름하지만 삶이 흔적들이 그대로 끈적끈적하게 녹아있는 후통의 풍경이 있죠. 그것 자체가 중국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일단 없애고 보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게 개발의 본질적인 특성이자 한계이기도 하죠. 사실 우리에게도 몰개성하고 획일적인 개발 정책의 경험이 있잖아요. 새마을 사업이 그랬죠. 그래서 중국의 지금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좀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문화적인 발언들이 많이 나와서 이 상황에 영향을 미쳤으면 하는 바람만 갖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후통을 더 자주 걷고 더 많이 찍는 것 밖에 없더군요. 비참하게 찍기 보다는 아름답게 찍으려고 해요. 후통 안에는 다른 곳과 차별되는 미장센이 무궁무진합니다. 돈이 없어서 낙서하듯 꾸며놓은 담벼락, 거미줄 같은 동네의 지리를 꿰고 있는 코흘리개 꼬마, 이웃집 새와 날마다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 주인 없는 집에서 조용히 몸의 물기를 말리고 있는 빨래 등등.. 저는 인위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찰나의 고즈넉함을 포착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걷습니다. 바로 이때다 싶으면 삼각대를 펼치는 거죠.

WH 사진전 계획이 있는지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전은 의미가 없고, 작품이 좀 더 성숙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질 생각입니다. 그래도 후통에서 작업한 사진들은 올림픽 이전에 한번쯤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곳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중국인이나 그 바깥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가 감동할 수 있는 진실 되고 아름다운 순간을 많이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올 겨울에도 저는 목도리 두르고 후통을 걸으며 시간을 보낼 것 같네요.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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