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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칼럼

영국의 새로운 국제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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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거창한 중동정책이 파경에 처하자, 마지못해 평화적인 분쟁 해결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한 예로 미국은 북한과 핵 프로그램 불능화에 합의했다. 또 애나폴리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회담을 주선했다. 미국은 이 회담에 ‘악의 축’이라던 시리아도 불렀다. 2001년 이후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동맹인 영국은 전쟁에 집착하는 부시 정권과 결별하고, 벌써 이런 길을 걷고 있다. 미국식 제국주의의 소규모 형태이긴 하지만, 영국의 현 정책은 새로 선출될 미 대통령의 노선을 예고하는 듯하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부시의 중동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 결과는 힘이 약한 동맹국인 영국을 강대국 미국의 ‘종속국가’로 만들었을 뿐이다. 영국은 자국의 군사적 능력과 외교적 영향력이 부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이라크 전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영국의 기여는 미미해, 부시는 블레어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영국은 호전적인 미국과 의심 많은 유럽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데 실패했다. 세계 무대의 한 축이던 영국의 자존심은 심하게 훼손됐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군사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이슬람권과 전 세계에서 영국의 명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슬람권의 반(反)영국 정서는 반미 정서에 버금간다. 영국이 전쟁 전과 같은 신뢰를 회복하려면 수년간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블레어의 유산은 미국의 맹방이라는 전통과 유럽 국가라는 현실 사이에서 브라운을 헷갈리게 했다. 독자적 글로벌 파워도 아닌 데다, 블레어가 만든 미·영 동맹 축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브라운은 통합된 유럽으로 우물쭈물하며 다가서고 있다. 미국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여기는 브라운은 최근 외무장관인 데이비드 밀리밴드가 지나치게 친유럽 성향의 연설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는 전환기에 있게 마련인 불확실성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블레어-부시 연대가 종말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지는 못한다.

 일방주의와 예방적 선제 공격이란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 브라운은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유럽연합(EU)·영연방 등 다양한 국제기구와 동맹의 협력에 기반한 ‘실질적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이는 영국을 세계 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소프트파워’ 전략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듯하다. 런던 금융가와 영국문화협회·옥스팜(국제구호단체)·BBC는 영국적 가치의 우수성을 홍보하려는 계획을 마련했다.

 브라운의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랍권의 사회 변혁과 정치 개혁을 유도해야 한다. 먼저 블레어식으로 이슬람권을 ‘극단주의자’와 ‘온건주의자’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온건주의자는 사실 서방에 엄청난 무기 판매 시장을 제공하고, 이슬람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아랍 독재자를 말한다. 이런 구분법은 아랍권에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 극단주의자들을 부추기는 데 일조할 뿐이다.

 블레어 집권기의 경험으로 영국은 국제적인 정당성 없는 전쟁은 패배와 부도덕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국제적 정당성이란 실질적인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영국은 다른 나라를 위협할 능력은 없지만 자신의 잠재력으로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변화를 이끌 수 있을 정도의 실질적인 군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영향력이 감소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를 두루 갖추고 세계 전략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도 이에 맞춰 새로운 외교 정책을 이끌 것으로 본다.

쉴로모 벤아미 전 이스라엘 외무장관
정리=정재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