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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이제는실천이다>5.사장되는 여성인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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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낸시.제니퍼.브렌다.로라…」.
미국 무역대표부 직원 명부에 나오는 이름들이다.여비서들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이들은 부대표.섬유협상 수석대표.정보담당 차관보.총무담당 보좌역등의 책임을 맡아 미국 대외무역협상을 이끌고 있는 주역들이다.
우리쪽 통상협상대표단들이 같은 수의 미국 대표단과 며칠씩 철야 실무회담을 벌일 때면 많은 경우 두명에 한명 꼴로 진을 친이들 협상 베테랑 「여성군단」이 꼬치꼬치 끈질긴 협상을 주도한다. 지난 수년간 미국측과 통상협상을 벌여온 우리측 K씨는『일본을 제외하고 한국만이 남성 1백%의 통상협상단을 구성하고 있다』며『통상협상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국제회의에 나가 보면 유독 남성들만 우글거리는 우리가 어떤 때는 창피할 정도 』라고 말한다. 민간부문도 마찬가지다.
태평양경제위원회(PBEC)회담등 국제회의 출장이 잦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배이동(裵利東)국제부 이사는 국제회의에서 마주치는 각국 여성 대표단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등 동남아 각국의 경우 대표단의 30~50%가 여성들이다.이들에게는 특유의 강점이 있다.유창한 영어,부드럽고도 야무진 협상태도가 자칫하면 거친 다툼으로 발전될수 있는 협상무드를 올바르게 이끌기 때문이다.』 언어표현력에 있어 남성 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인 여성인력이 표현 하나하나가 문제되는 협상 테이블에서 단 한명도 쓰여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는 것이다.통상관련 국제회의에 남성대표만을 보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 은 하루이틀 사이에 고쳐질성질의 것이 아니다.
통상대표단의 일원이 되려면 경제기획원이나 상공자원부등 관련 행정부처에서 통상관련 일을 보며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여성은 행정고시에 합격해도 보건사회부 가정복지과.아동복지과등 이른바 「여성 관련」부서에만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90만명의 전체 공무원중 25%가 여성이지만 이들의 98%가6급 이하의 하위직이라는 통계도 우리의「반쪽짜리」인력활용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 우리가 재학생 1만5천명규모인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화여대 홍보과장 이종선(李鐘善)씨는『신입생 의식조사를 해보면 99%의 학생이 커리어우먼을 목표로 내세운다.그들의 의식속에서 결혼은 2차적인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이 99%를 소화할 사회경제적 구조를 갖추고 있지 못하고 그들에게「결혼이나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는데 있다. 능력위주로 사람을 키운다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아줌마같건,아가씨같건 차이가 없어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커리어우먼의 겉모양에 대한 선입관에 매달려 있다』고 조순경(趙順慶.이대여성학)교수는 진단한다.
진정한 의미의 동료로 여성을 대할 수 없는 풍토에서 자란 한국 남성들이 동남아등 해외투자 현지 공장에 여자 공원 관리자로파견되면 폭행.성폭행등 거친 행동을 일삼아 현지에서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하고 있는 것도 우리 사회의 「반쪽 인력 사용」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는 경우다.
「21세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구호를 매일 어디선가 듣고 있고 21세기의 시대가 정보처리능력.창의력.기획력이 중시되는 「소프트」한 경제시대라고 입을 모으지만,여성이 남성보다 소프트한경제활동에 적격이라는 분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그러면서도 국제화.세계화를 하겠다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한해 배출되는 7만2천명의 여성 인력 활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만 한 것이 21세기를 불과 5년 앞둔 우리 경제의 상황이다.
93년부터 삼성,이랜드등이 각각 6백여명(신입사원 전체의 15%),1백82명(전체의 40%)의 여성인력을 채용한 것은 이례적인 경우일 뿐이다.
오는 14일은 우리나라가 유엔의 남녀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한지 10년째가 되는 날이다.
그러나 채용.승진에서 여성을 차별할 경우에 대한 처벌조항이 약한 남녀고용평등법만으로는 여성인력 활용의 확대를 기대하기 어렵다.더욱 큰 문제는 이같은 제도 마련의 선행조건인 의식전환이지금도 세계화를 외치는 우리 사회의 정치가.기업 가들에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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