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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국가들, 노동·복지法 조용한 수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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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13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만난 재외동포인 한인숙(한마바캔 중학교) 교사는 “국가가 주는 연금 혜택만 바라보며 살던 시대는 갔다”고 말했다. 한씨는 “최근 프랑스가 복지연금이니, 공공부문 개혁이니 하며 야단이지만 스웨덴은 지난해부터 노동·복지 관련 법령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왔다”고 했다. 개혁 수준도 프랑스가 추진 중인 강도를 능가한다는 것이다.

요람은 OK, 무덤까지는 NO

이에 대해 노조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스웨덴 최대 노조 가운데 하나인 TCO의 마츠 에스미르 연구원은 “무조건 반대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며 “노조는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연구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을 찾는 실용적 비판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개혁에 대한) 프랑스 노조의 행동은 우리나라에선 찾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프레드릭 라인펠트 스웨덴 총리는 올해 9월 “아프다는 핑계로 일하지 않고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질병연금법 개혁안을 내놨다. 질병연금은 질병으로 일을 할 수 없는 근로자에게 주는 생활보조금으로 우리나라의 산재보험과 유사하다.

개혁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근로자가 받던 임금의 80%를 연금으로 줬으나 이를 75%로 낮추는 대신 지급시한을 12개월에서 18개월로 늘렸다. 하지만 18개월 뒤엔 64%만 연금으로 지급한다. 이나마 30개월 뒤엔 한 푼도 안 준다. 라인펠트 총리는 “이렇게 하면 3년간 5200억원을 정부가 더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아프냐보다 얼마나 일할 수 있느냐를 따지겠다”며 “모든 사람이 일을 하는 산업환경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넉넉한 노후생활을 하는 스웨덴 노인들도 복지축소의 대상으로 검토되고 있다. 사진은 스톡홀름 시립문화회관에서 체스를 두며 여가를 즐기고 있는 노인들. [중앙포토]

노르웨이는 이미 지난해 질병연금 관련 법률을 바꾸었다. 근로자가 병가 진단을 받더라도 반드시 재활시스템을 밟아야 한다. 재활작업 뒤에도 도저히 일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져야 질병연금이 지급된다. 노르웨이 정부는 이를 통해 2009년까지 질병으로 인한 근로손실 일수를 2001년보다 20%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이런 개혁에 힘입어 노르웨이의 고용률은 지난해 말 76%를 기록했다. 유럽연합(EU) 평균(64%)보다 12%나 높다. 노르웨이 노총(LO)의 리브 산네스 경제사회담당은 “현재 노르웨이는 일하면 인센티브가 더 많은 복지시스템으로 전환 중”이라며 “개혁 가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덴마크는 2년여 전 우리나라의 고용보험법과 같은 실업연금법을 수술했다. 실업자가 정부의 직업알선을 거부하면 3주일 동안 실업급여(실업 전 임금의 90%)를 주지 않는다. 3주일 뒤 다시 거부하면 실업보험제도에서 아예 방출해 버린다. 덴마크 경영자총협회(DA)의 헤닝 가드 노동시장정책 담당자는 “덴마크 고용정책의 목표는 구직자에게 신속하게 고용기회를 주는 데 있다”며 “이는 실업상태가 길수록 일하려는 의욕도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덴마크의 실업률은 3.9%로 EU 평균실업률 7.9%보다 훨씬 낮다.

스웨덴은 지난해 하반기에 실업수당을 확 떨어뜨렸다. 지난해까지 스웨덴은 근로자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던 15년간의 임금을 합산한 뒤 그 평균액의 80%를 연금으로 지급했다. 이러다 보니 55세만 돼도 직장을 그만두고 연금생활자로 전환하는 풍속도가 생겨났다.

라인펠트 정권은 이 제도를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퇴직 뒤 돈을 많이 받도록 뜯어고쳤다. 지급기간도 실업 뒤 100일까지는 70%, 이후 200일까지는 65%만 지급한다. 라인펠트 총리는 TV에 출연해 “실업급여제도 개혁을 통해 1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고 평가했다.

유럽위원회(EC)는 올해 발간한 ‘2006년 유럽의 고용’에서 “해고를 엄격히 제한하는 나라일수록 장기실업자가 비정상적으로 많고, 근로자들의 고용불안도 심하다”며 “덴마크는 노동시장이 가장 유연하고, 실업불안감은 유럽의 다른 나라 근로자보다 훨씬 낮다”고 평가했다. EC가 주목하는 덴마크 고용정책의 핵심은 유연안전성(Flexicurity)이다. 해고와 채용을 자유롭게 해 기업이 필요할 때 바로 인력조정이 가능하도록 한다. 그래서인지 한 해 25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기고 25만 개가 사라진다. 정부는 실업자에게 그의 직업이력과 능력 등을 꼼꼼히 분석한 뒤 세밀하면서도 강도 높은 직업훈련 시스템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근로자가 기업 사정에 따라 직장을 옮겨야 할 경우 새로운 직업세계로 진출하거나 기존 일자리보다 더 나은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핀란드의 고용인력 중 정규직은 37.9%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비정규직이다. 그나마 정규직의 절반은 반나절만 일하는, 사실상 비정규직이다. 1990년대 초 경제위기를 겪은 뒤 기업들이 고용유연성을 높여왔기 때문이다. 핀란드 금속노조(Metali)의 야리 하카라이넨 국제담당관은 “기업들마다 전 세계와 경쟁하게 되면서 비정규직도 늘고 있다”며 “노조는 교육훈련을 통해 숙련도를 높이고 경영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김동원 교수는 “내수보다는 수출에 의존하는 북유럽 강소국의 경제특성상 외부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유연한 고용구조가 불가피하다”며 “수출주도형인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유연안전성(Flexicurity)=고용의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전성(security)이 결합된 용어다. 노동시장에선 높은 수준의 고용 유연성을 보장하고, 근로자에게는 필요한 때에 적정한 복지혜택을 주는 사회안전망을갖춘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면서 근로자도 보호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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