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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우울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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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울증을 앓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여러 천재 예술가 때문에 우울증에는 낭만적 신화가 깃들었다. ‘마음의 감기’로 비유되기도 한다. 가볍게 스쳐가는 일시적 증상이라는 것이다.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는 『우울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이런 사회적 인식들을 비판한다. 특히 우울증을 창조성과 감수성의 원천으로 보는 태도를 공격한다. 그에 따르면 우울증에 대한 착각은 좌우를 불문한다. 좌파적 관점에서 우울증은 상업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소극적 저항쯤으로 여겨진다. 우파들은 심리치료나 약물치료 같은 손쉬운 처방에 기대지 말고 어려움을 이겨내라고 강조한다. 모두 우울증을 질병이라기보다는 인격적·도덕적·미적·지적 속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우울증을 이처럼 ‘질병 이상’ 혹은 ‘질병 이하’로 보는 인식들이 우울증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를 막는다고 그는 강조한다.

우울증은 이미 개인적 질병일 뿐 아니라 사회적 질병이기도 하다. 특히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좌절에 동반되는 선진국형·자본주의형 질병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뒤 찾아오는 정신적 공허이기도 하고, 극심한 경쟁구도에서 좌절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 특질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21세기 인류를 괴롭힐 주요 질병에 우울증을 올렸다. 2020년에는 모든 연령에서 나타나는 질환 중 1위에 오를 것이라는 경고도 내놨다. 『우울증에 반대한다』는 미국 직장의 연간 우울증 관련 비용이 4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국민총생산의 3%에 이르는 수치다.

『진보의 역설』이란 책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의 단극성 우울증(조증 없는 우울증) 환자는 최근 50년 사이 10배나 늘었다. 권력 엘리트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들이 존재증명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위기감을 조장하고 불안심리를 퍼뜨리는 것이 주요인이다.

우울증의 심각성은 국내도 마찬가지다. 2006년 통계청 사회통계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1명은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매년 자살자 수가 1만 명을 넘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타이틀을 수년째 지키고 있다.

때마침 강화도 무기탈취 사건의 용의자 조모씨도 우울증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에 대한 여러 석연찮은 점 때문에 우울증 전력을 조씨 스스로 부풀린다는 의혹도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울증이 점차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범죄의 주원인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 건강을 위해서도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