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와의 우연한 만남이 꼬박 12년 찍게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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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다큐멘터리 '송환'. 제작 기간:12년. 총 촬영 시간:8백여시간. 촬영에 쓰인 비디오 테이프:5백여개. 여기서 12년이란 말 그대로 12년이다. 제작비가 모자라는 등 사정상 제작이 중단된 시간이 포함된 게 아니라 찍고자 하는 이야기를 꼬박 12년 동안 쉼 없이 쫓아다녔다는 얘기다.

지난달 미국 유타주 파크 시티에서 열린 2004 선댄스 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Freedom of Expression Award)을 받은 '송환'의 김동원(49) 감독을 만나 그 '뚝심'의 제작 과정을 들어봤다. 올해로 20회를 맞는 선댄스 영화제는 독립영화의 산실로 꼽히는 영화제로 한국 다큐멘터리가 초청받아 수상한 것은 '송환'이 처음이다.

김감독은 상계동 빈민촌 철거 현장을 고발한 '상계동 올림픽'(1988년)과 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명동성당 농성 과정을 담은 '명성, 그 6일의 기록'(97년) 등을 발표하며 국내 독립영화계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소재로 한 '송환'은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과 관객상을 받았으며 일본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됐다. 올 초 생긴 국내 예술영화전용관들의 공동배급망 '아트플러스'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감독과 비전향 장기수들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1992년 아는 신부의 요청으로 지방 요양원에 있던 장기수들을 서울로 데려온다. 출소한 뒤 오갈 데가 없었던 장기수들은 그가 살던 동네에 머물게 되고 그로부터 10여년에 걸친 인연이 시작된다. 45년을 복역해 기네스북에 오른 김선명씨도 중간에 합류한 이들 중 하나다.

2001년에는 이들의 후일담을 담기 위해 평양 입국을 시도했다 좌절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당시 남파 간첩을 소재로 한 기록 영화를 찍는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습니다. 처음 만날 때도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고가긴 했어도 이렇게 일반에 공개하는 작품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기획에 들어간 건 장기수 북송이 논의되기 시작한 99년 무렵이었다. 그 전까지는 인간적인 호기심이 컸다. 초반에는 야유회에 따라갔다가 김일성 찬가를 부르는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정치공작원'이었던 이들도 이념이 다를 뿐이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여느 노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라는 식의 경직된 태도로 나를 가르치려는 사람한테는 거부감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고문과 수십년의 감옥 생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려는 태도에서 순수함과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론 연애도 하고 질투도 하고 잘난 척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송환'은 이렇듯 장기수들의 인간적 면모를 차분히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영화에는 석방 당시 화환이 김선명씨 것보다 작았다고 어린애처럼 항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송환이 결정되자 가깝게 지내던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목걸이와 반지를 선물하는 정 많은 사람도 등장한다. 그들도 결국 분단의 피해자였음을 느끼게 하는 가슴 아픈 사연도 빠지지 않는다.

"김선명씨 동생이 '(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피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죠.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당했던 과거가 되풀이되는 게 끔찍한 겁니다. 일부 북송자 가족들은 '송환' 개봉 탓에 혹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어처구니 없는 분단의 역사지요."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이 "믿을 수 없는(unbelievable) 이야기"라고 했다는 '송환'. 북한에 갇혀 있는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와 더불어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인 한반도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이 '믿을 수 없는'이야기는 다음달 19일 서울 하이퍼텍 나다.씨네큐브.광주극장 등에서 개봉한다.

기선민 기자<murphy@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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