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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보트는 밤호수의 한가운데에서 맴돌고 있었다.소라의 말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아주 고요하였다.달빛이 있어서 칠흑같은 밤은 아니었고,간혹 잠들지 못한 물고기가 노는 것인지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소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윤찬과 나는 미경이라는 계집애가 얄밉다는 핑계로 연신 소주병을 주고 받으며 목을 축였다.소라가 말을 마치고 어깨를 한번 또 들썩여보이면서 소주병을 향해서 손짓했다. 『이리줘 봐.나도 한잔 해야겠어.말하다 보니까 괜히 또 열나네.』 소주병을 건네받은 소라가 병마개가 달렸던 부분을남방 아랫자락으로 쓰윽 한번 문대고 나서 거기에 입술을 대고 두 모금쯤을 삼켰다.소라가 인상을 찡그렸다가,나 잘 마시지,그러면서 활짝 웃는데 애교가 만점이었다.
『난 73년생이라구.3수를 했다 이거지.아니 그렇다구 너희들에게 형이나 오빠노릇을 하겠다는 건 아니야.그런 건 상관없어.
정말이야.』 윤찬이 보트 뒤쪽 난간에 반쯤 몸을 기대고 말하기시작했다.
난 말야,정말이지 왜 내가 대학에 다녀야 하는지를 지금도 모르겠어.글쎄,집에서 성화들이 대단했다니까.집안 망신이라는 거야.특히 아버지 입장을 생각해드려야 한다고들 그랬어.우리 아버진장학관이라구.장학관인데도 부자라구.그래서 내가 한번은 어머니한테 물어봤지.무슨 교육자가 이렇게 부자냐구.그랬더니 물려받은 유산때문이라는 거야.그거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구,어머니는 마치 빚을 물려받은 사람같은 말투로 그러더라구.하기야 할 수 없겠지 뭐.안그래,히히.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내가 대학엘 다녀야 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야.나한텐 형하고 누나가 하나씩 있거든.근데 둘 다 공부를 아주 잘했어.서울대학을 나왔거든.누나는 검사한테 시집을갔구,형은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지금은 NHK방 송국에서 일하고 있는데,하여간 우리 형은 괜찮은 인간이야.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우리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뭐라구 그러는지 알아.
이놈저놈 다들 일단은 대학에 가고 보자 그러는게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거야.그러니까 당신의 아들 중에도 대학에 안가는 놈이 있고 그래야 아버지 말발이 서는 거 아니겠느 냐구.
어머니한테 내가 그랬더니 뭐래는지 알어.그거야 그냥 해보는 말이라나. 고3때였는데,하루는 아버지가 날 앉혀놓구 또 일장 연설을 하는 거야.왜 대학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가,우리교육이 목표하는 바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데,너는 현실에 살고 있다… 하여간 뭐 그런 말씀이었어.아마 두 시간도 더 넘게 붙잡혀 있었을 거야.나중에는 너무 지겨워서 내가 아버지에게 그랬지.그러죠.대학에 가겠습니다.그날밤에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어.
난 그때 오토바이에 미쳐 있었거든.일단은 오토바이를 누군가에게 줘버리기로 작정한 거야.공부를 해보려고 말이지.그렇지 않아도 오토바이를 갖고 싶어서 안달을 떨던 녀석이 있었거든.빗길이었어.달렸지 뭐.그러다가 사고가 난 거야.난 여섯 달 동안이나입원해 있어야 했어.물론 시험은 쳐보지도 못했어.재수가 없어서재수를 시작하게 된 셈이지 뭐.재수 학원보다는 난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게 좋았어.겨울이면 스키장에 가고,스키장에 못가면 볼링장에서 살고,여름이면 서핑이나 제 트스키를 타고,행글라이더도죽이지… 거 번지 점프라는걸 빨리 해봐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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