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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주인공의 허무한 결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지난 석 달 동안 수·목요일 밤 10시대면 확실하게 할 일을 만들어주던 MBC의 판타지 사극 ‘태왕사신기’가 끝났다. 덕분에 TV에서는 보기 힘든 영화 같은 멋진 화면을 즐겼다. 생소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결합한 이야기 전개 방식도 참신했다. 한마디로 새로운 사극의 문을 열어젖히는 데는 성공했지 싶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하지만 유난히 느려터진 나의 드라마 인지 능력 탓일까. 마지막회까지 보고 나서도 주인공인 담덕(배용준)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초반 이 드라마가 재미있었던 건 “왕이 돼야만 하는 운명을 깨달아야 하는” 주인공 담덕에 대한 설정과, 그렇지만 왕이 되기 싫었던 담덕의 성격이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었다.

본인은 내키지 않지만 주변에서 자신과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해 오고,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적을 만듦으로써 결국 왕이 되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 담덕의 정신적 성장 과정은 흥미로웠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왕이 돼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권력의지로 다져진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 사신(四神)의 신물(神物) 도움으로 드넓은 만주 벌판에 쥬신의 땅을 새로 세우는 후반부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담덕은 드라마 전개가 중반을 넘어선 이후에도 사신의 신물을 찾는 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드라마가 휴머니즘 가득한 담덕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기울다 보니 주인공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드넓은 중국 땅에 “길을 내겠다”며 정복전쟁을 암시하는 그의 의지가 담긴 대사마저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회에서는 “하늘의 뜻을 버리고 인간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며 하늘이 준 힘을 포기하고 신궁으로 흑주작이 된 기하를 쏘아 기껏 모인 사신의 신물을 허무하게 없애 버린다. 정작 시청자들은 시리즈 내내 그 사신의 신물이 한자리에 모여 깨어나면 어떤 대단한 일이 벌어질까에 대해 궁금증으로 버텨왔는데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담덕은 아주 수동적인 인물일 뿐이다. 왕이 되는 것도 그렇게 태어난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기하와의 어긋난 사랑 역시 둘 관계의 중요한 순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기하다. 사신의 신물 또한 그의 강한 의지로 찾아낸 게 아니었다.

그렇듯 모든 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반전처럼 내린 자신의 능동적 결정이라는 게 ‘하늘의 힘을 돌려버리겠다’라고? 그러곤 왕으로서의 운명과 신물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한다? 이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광개토대왕의 캐릭터로선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그는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걸까.

‘태왕사신기’가 전범으로 삼았다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의 목표는 확실하다.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인 반지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반지를 돌려주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가지를 치지만 관객은 주인공의 그 뚜렷한 목표 하나를 따라가면서 길을 잃지 않는다.

‘태왕사신기’가 석 달 동안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담덕이 쥬신의 왕이 돼야 한다는 일념하에 열심히 그를 따라다녔던 시청자로선 허탈할 수밖에. 뚜렷한 목표의식이 부족한 담덕은, 그가 배용준이었다 해도 너무 약했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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