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미묘한 시기 미묘한 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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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열린 과거사관련위원회 위원들과의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김경빈 기자]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의 BBK 수사 결과 발표 하루 뒤인 6일 검찰과 관련해 미묘한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은 국가정보원.경찰청.국방부 등 3개 국가 기관의 과거사위원회 활동이 12월로 모두 종료됨에 따라 이날 청와대에서 위원들과 오찬 모임을 했다. 인사말에서 노 대통령은 "시절이 어수선하고 날이 추운데 여러분들과 만나 마음이 훨씬 안정된다"며 "여러 우여곡절이 많아도 될 일은 되고 할 일은 하고,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문제의 발언은 위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던 중 나왔다. 다음은 발언 요지.

"사실 검찰.법원 쪽도 어떻게 해봤으면 하는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법원은 성격상 국민의 신뢰가 필요한 기관이어서 외부에서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검찰은 대통령이 한번 명령을 할 만한 수준에 있는데 그동안 저와, 대통령과 가깝다는 사람들이 5년 내내 수사를 받아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대선자금 같은 것에서 대통령도 자유롭지 않았고, 그 뒤에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났지만 이런저런 의심을 받을 만한 일들이 우연이든 우리의 잘못이든 연속돼 검찰 조사를 쭉 받는 입장이 돼 있었다. 지금도 (삼성 비자금 의혹) 특검 대상이 돼 있어 놔서…."

특히 노 대통령은 "그런 문제를 대통령의 결단으로 풀기가 어려웠다"며 "검찰 부분은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이날 오찬 참석자들 중 검찰과 관련된 인사는 없었다. 그런 만큼 검찰 얘기를 굳이 꺼낼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검찰의 BBK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청와대는 공식 입장을 일절 내놓지 않았다. 오찬 직전에 기자들과 만난 문재인 비서실장도 "우리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에선 검찰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기류가 적지 않게 흐른다. 정치권 일각에선 "노 대통령이 검찰에 대한 생각을 이런 식으로 우회해 표현한 게 아니냐"고 해석했다.

한나라당 박형준 대변인은 "노 대통령 발언은 누가 봐도 정치개입.선거개입이란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며 "노 대통령은 자중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삼성특검법에 대해 말할 때는 '검찰의 위신과 신뢰를 지켜 주고 싶었다'고 하더니 여당의 검찰 때리기 공세가 한창인 상황에서 느닷없이 검찰개혁 실패를 운운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청와대는 이런 시각을 경계했다. 천호선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과거사위원회 위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검찰도 과거사 관련 부분이 있는데 그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부분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최근 현안과 연관된 발언은 절대 아니다"고 강조했다. 천 대변인은 "국정원.국방부.경찰과 달리 검찰에서는 과거사 정리가 이뤄지지 못했다"며 "대통령과 측근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지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는 소회를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박승희 기자 ,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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