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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44년간 고교 졸업앨범 찍어온 조재설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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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졸업이란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통과의례예요. 과거엔 졸업식이 끝나면 선생님들과 교정에서 사진 찍느라 바빴죠. 그러나 지금은 가족이나 친구끼리 몇장 찍고는 훌쩍 떠나는 경우가 많아요. 사제지간의 끈끈한 정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더군요."

졸업 시즌이다. 누구나 빛 바랜 졸업앨범 하나쯤은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옛 추억을 들춰본다. 조재설(趙載卨.81.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씨는 1960년부터 지금까지, 44년간 고등학교 졸업앨범 사진만 전문으로 찍어온 사람이다.

趙씨는 그동안 서울 숙명여고를 비롯해 경기.진명.무학.수도여고와 동구여상.서울여상, 그리고 경복.우신고 등 10여개 고교에서 졸업앨범 사진을 찍어왔다. 특히 1962년 첫 인연을 맺은 숙명여고의 경우 수송동 시절을 거쳐 지금의 도곡동에 자리잡기까지 42년간 단골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

趙씨는 그동안 자신의 카메라 앞에 섰던 학생들 숫자가 줄잡아 1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졸업앨범용 사진을 찍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아요. 우선 인간미 넘치고 자연스러운 사진이라야 해요. 증명사진처럼 틀에 박힌 사진으로는 안돼요. 학생들도 평생 남을 사진이라며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데요."

趙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북청이다. 함흥고보에 입학했던 1930년대 말, 입학 선물로 시중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던 일본제 '뉴 세미 랭키' 카메라를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당시 趙씨의 부친은 정어리와 콩깻묵 수출로 많은 돈을 번 북청의 유지였다. 멋진 카메라에 매료된 趙씨는 사진잡지 '아사히(朝日) 카메라'를 구해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광복이 되고 38선이 그어지면서 부르주아 집안인 趙씨네 가정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4남2녀 중 장남이었던 趙씨는 1.4후퇴 때 부인과 다른 가족을 남겨놓고 혼자 남쪽으로 내려왔고, 이후 지금까지 홀몸으로 지내고 있다.

1950년대 말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의 스틸 사진을 만들다 우연한 기회에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의 동생을 알게 됐다. 사진가였던 그와 함께 졸업앨범 사진 찍는 일을 시작했던 게 평생의 업(業)으로 이어졌다.

1988년에는 숙명여고에 재직하던 한 선생님의 주선으로 강남구청에서 '개미 아저씨 사진전'도 열었다. '개미 아저씨'는 趙씨의 허리가 다른 남자들에 비해 유난히 가늘다 해서 숙명여고 학생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물장수로 유명했던 북청은 4만명이 살던 큰 도시였지요. 뒤로는 개마고원이 펼쳐졌고, 남대천이 읍내를 관통해 겨울에는 무척 추웠어요.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내가 요즘은 이만한 날씨에도 목감기로 고생하니 이제 나도 남한 사람이 다 됐나봐요…."

갈수록 몸이 옛날같지 않다는 趙씨는 "지난 44년간 앵글에 담았던 수많은 학생의 모습, 개발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해 온 한강 등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어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김세준 기자<sjkim@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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