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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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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요즘 아시아 문화계에서는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화제다. 지난달 초 그의 유작으로 알려진 ‘매지첩(妹至帖)’ 모사본이 40억원 넘는 초고가에 홍콩의 경매장으로 나온다는 뉴스가 실렸다. 모사본 열일곱 글자에 40억원이니 진품이라면 값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어 이 달에는 그의 필체를 알 수 있는 ‘유목첩(游目帖)’이 원래 모양대로 복원됐다는 소식이 나왔다.

유목첩이란 작품 역시 모사본이다. 당나라 때 만들어져 1800년대 말 유실됐다가 일본으로 흘러 들었던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의해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그 촬영본을 찾아 디지털 기법으로 복원했다는 게 화제가 된다.

중국 역대 명필 중의 명필이자 서예의 성인, 서성(書聖)으로 치부되는 왕희지의 별호가 크게 실감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하늘이 내려 준 천부의 소질이겠거니 하고 왕희지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타고 태어난 바탕에 비범한 노력을 기울여 그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서법을 익히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이 얼마큼인지 알 수 있는 일화가 많다. 호숫가에서 글씨 연습을 하다가 못 물을 모두 붓 씻은 검은 물로 물들였다는 지금 장시(江西)성 ‘묵지(墨池)’의 고사가 우선이다.

사윗감을 고르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던 세도가 집안의 심부름꾼이 잘 보이려 노력하는 형제들과는 달리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손가락으로 배에다가 글씨를 쓰는 그를 보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배를 드러내고 동쪽 방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袒腹東床)이란 그의 얘기는 아직 ‘훌륭한 사윗감’이라는 뜻의 성어로 쓰인다.

글씨에 열중하던 그가 끼니를 잊고 있다가 밀가루 떡을 들여 보내자 벼루에 담긴 먹물을 찍어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쯤 되면 그가 과연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충분히 느껴진다.

그의 필체를 흠모한 당 태종이 왕희지의 모든 작품을 거둬 들여 자신의 능묘에 함께 묻게 했다는 설, 여황제 무측천 역시 그 작품을 짝사랑해 묘실에 함께 매장토록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그의 진짜 작품이 지금까지 한 점도 남겨지지 않은 것인가.

진실의 노력과 그 혼이 담긴 명품은 천고에 빛을 발한다. 그를 엿보고자 하는 세인의 열망이 원자폭탄의 재앙을 걷어 내고 작품을 복원케 했다. 학력 위조와 거짓, 비방과 모략의 정쟁으로 점철한 올해 한국 사회는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까. 세밑 왕희지 글씨가 눈길을 잡는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