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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중앙회 그늘 벗어나도 수출만 잘 되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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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래서 입소문 

'상주 배' 외서농협의 고수익 비결 뒤엔

까다로운 품질 관리
출하량·시기도 조절

농협은 막강한 조직이지만 유독 농산물 도매시장에선 맥을 못 춘다. 여전히 민간 도매업자나 대형 할인점에 밀린다. 농협이 농산물 직접수매를 꺼리기 때문이다. 농민은 할 수 없이 헐값에 민간 도매상이나 할인점에 넘긴다. 이런 유통구조를 바꿔달라는 농민의 요구에 농협은 되레 농민을 탓한다. 농협이 농민과 계약재배를 해도 값이 떨어질 때만 농협에 팔고 값이 뛰면 계약을 파기하기 일쑤라는 것.

1998년 이전에는 면 단위의 작은 조합에 불과했던 상주시 외서농협. 지금은 상주 시내 9개 조합의 배 사업을 주도하는 거점이 됐다. 현재 외서농협에 배를 납품하는 농가는 모두 230여 가구. 이들이 외서농협에 배를 납품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전보다 4배 이상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외서농협이 배를 제값 받고 팔아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부근의 다른 조합 농가도 배를 들고 왔다. 처음에는 불만이던 타 지역 조합장들도 결국 외서농협과 공동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외서농협도 한때 농민이 배를 따오면 이를 공판장에 전달해 주는 역할에 그쳤다. 개별 농가들은 굳이 배 품질을 높이기 위해 애쓸 이유가 없었다. 소비자도 국산 배를 외면했다. 외서농협은 이런 악순환을 '공동 출하, 공동 계산제'를 통해 극복했다.

농가들이 재배한 배를 가져오면 외서농협은 일단 시장상황에 따라 출하량을 조절했다. 품질관리도 철저히 했다. 배 품질을 5단계로 나누고, 1등급 배는 일반 배보다 20~30% 비싸게 팔아줬다. 품질이 나쁜 배는 아예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김용해 외서농협 조합장은 "1등급 배를 생산하면 수입이 늘어나니 농가 스스로 배 품질을 높였고, 이런 선순환이 궤도를 탔다"고 설명했다.

외서농협은 수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2000년 대만수출을 시작했고, 2005년부터는 미국 시장도 뚫었다. 지난해 매출 52억원 가운데 50%를 수출로 벌어들였다. 수출 제품은 내수보다 값을 30% 이상 비싸게 받을 수 있다. 국내 출하도 백화점.할인점과 직거래 비중을 늘리고 있다.

김 조합장은 "우리 농업의 마지막 생존 카드는 수출과 마케팅 강화"라며 "농협이 나서서 복잡한 농산물 유통구조를 확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래서 입방아  

농협법 주업무는 농축산물 유통 지원인데

중앙회 직원 76%
은행·보험업종 일

농협의 주업무는 농축산물 유통을 지원하는 경제사업이다. 농협 설치 근거인 농업협동조합법에 명시된 중심 역할이다. 다만 경제사업을 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신용사업(은행.보험)을 하도록 길을 터놓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농협중앙회 직원 1만5773명 중 76%(1만2064명)가 신용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중앙회의 자산 구성도 신용사업이 절대적(95.7%)이다.

신용사업에 치우친 중앙회가 전국 곳곳에 지점을 세우면서, 같은 지역에 단위조합 지점과 중앙회 지점이 나란히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단위조합은 저축은행처럼 상호금융을 하고 중앙회는 은행.보험업을 모두 한다. 그 결과 농협 점포는 전국 5145곳에 달한다.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의 5배에 달하는 규모다.

폭넓은 지역망에 농업금융에 주어지는 각종 혜택에 힘입어 농협의 신용사업은 공룡처럼 커졌다.

2006년 6월 기준으로 농협의 총 수신(107조원)은 국민은행(141조원)보다 뒤지지만 우리은행(93조원)을 앞서는 업계 2위다. 은행권 카드시장 점유율은 3위, 보험업 시장은 4위다.

중앙회가 돈되는 신용사업에 골몰하면서 경제사업은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비판이 농민들에 의해 제기돼 왔다. 경제사업의 손실을 신용사업의 이익으로 메워주는 의존적 구조가 농업경쟁력 향상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해 신용사업은 1조7440억원의 흑자를 냈고, 경제사업은 1147억원의 적자를 봤다.

농업경쟁력을 높이고 농협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두 부문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다.

국회 예산정책처 서세욱 분석관은 "농협이 신용사업이라는 별도의 주머니를 차고 있어 방만 경영을 부추기고 있다"며 "신용.경제가 조속히 분리돼야 농협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올 3월에는 20여 년의 논란 끝에 농협의 신.경 분리안이 발표됐다. 경제사업 부문과 신용사업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하고 중앙회는 조합 지원과 농정활동을 맡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시행 시기가 2017년이다. 정부는 분리에 앞서 자본금을 확충하기 위해 10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분리 의지가 없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군림하는 농협중앙회

"사료 사다 써라" 조합서 공장 짓자 압력
직영 '하나로' 수입산 판매가 국산의 배
농민들 "도와주진 못할망정 판 깨서야 … "

#서울 등촌동에 사는 이미경(42)씨는 올해 김장을 포기했다. 한 포기에 2000~3000원 하는 배추로 김장 담글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그러나 배추 산지인 충남 서산시 가구리 농민들의 표정도 밝지 않다. 이 마을 임승조 이장은 "지난해 배추 값이 폭락해 밭을 갈아엎은 경험이 있어 올핸 일찌감치 밭떼기로 도매상에 넘겼다"며 땅을 쳤다. 그는 "아무리 배추 값이 뛴들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라고 한숨지었다. 배추만 그런 게 아니다. 무.양파 같은 채소류나 소.돼지도 해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농민들은 농협이 도매상 역할을 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전국 조직을 거느린 농협이 나서면 출하량 조절을 통해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작물을 많이 심었는지 정보도 많다. 그러나 농협을 통해 출하되는 농산물은 전체의 45%에도 못 미친다. 국내 농산물 도매시장은 여전히 민간 도매업자와 대형 할인점이 장악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가격등락이 심한 채소류나 축산물을 농협이 민간 도매상처럼 투기적으로 거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돼지고기 생산자인 도드람 양돈협동조합은 2000년 40억여원을 들여 원주에 자체 사료공장을 지었다. 돼지를 키우는 조합원에게 싸고 질 좋은 사료를 직접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농협중앙회가 제동을 걸었다. 도드람 사료공장이 "중복.과잉투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딴 데 있었다. 도드람이 중앙회 자회사인 농협사료 제품보다 싸고 질 좋은 사료를 내놓자 농협사료의 입지가 흔들릴 걸 우려했기 때문이다. 중앙회 압력에 결국 도드람은 원주공장을 민간회사에 판 뒤 이 회사에 도드람 직원을 파견해 생산한 사료를 사다 쓰는 '복잡한 과정'을 감수해야 했다.

농산물 값 안정을 원하는 농민의 요구는 귓전으로 흘리면서 자회사 이익을 지키는 데는 안간힘을 쓰는 농협중앙회의 현 주소다.

◆몸집 불리기 바쁜 농협중앙회=농협중앙회는 최근 경남 밀양에 초대형 김치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지역조합이 운영하는 전국 11개 김치 공장에 비상이 걸렸다. 김치 공장을 운영 중인 전남 순천농협 유상철 이사는 "중앙회가 저가로 물량 공세를 펴면 작은 지역조합의 김치 공장은 모조리 문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앙회가 회원 조합의 사업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판을 깨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현재 중앙회는 자회사 21개, 손자회사 4개, 사내분사 4개 등 29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2000년 통합 농협중앙회 출범 뒤에만 11개를 신설했다. 그것도 모자라 야구단까지 인수하려다 여론에 밀려 취소하기도 했다. 한국농업경영인연합 이헌목 농업정책연구소장은 "농협중앙회의 문어발식 조직 확장은 '중앙회가 회원 사업과 경합하는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농협법 6조2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토불이 무색한 농산물 수입=농협중앙회는 1990년 국산 농산물 수출 길을 열겠다며 농협무역이란 자회사를 설립했다. 중앙회가 출자한 돈은 355억원이다. 그러나 지난해 농협무역이 수출한 국산 농산물은 450억원어치에 그쳤다. 반면 수입은 1257억원어치로 수출의 두 배를 넘는다. 수입액 가운데 34%인 427억원어치는 쇠고기였다. 더욱이 농협무역은 수출에서 23억원의 적자를 내고 수입 쇠고기 판매에선 34억원의 흑자를 봤다. 수출에서 난 적자를 메우기 위해 쇠고기 수입에 열을 올렸다는 얘기다. 농협무역만이 아니다. 중앙회가 직영하는 하나로클럽도 516억원어치의 수입 수산물을 팔았다. 반면 수협을 통해 구매한 국산 수산물은 249억원어치에 불과했다. 손형섭 한국협동조합학회장은 "농협중앙회가 농수산물 수입에 앞장서는 건 신토불이라는 구호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농협중앙회가 할 일은 농산물 수입이 아니라 지역.품목별 조합 차원에서 하기 어려운 영농기술 개발.교육이나 해외 마케팅.판로확보 지원"이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 정경민.박혜민.윤창희.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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