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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채권시장 요동의 이면 서브프라임의 시간차 공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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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19면

일시적인 통증인가 아니면 파국의 전조인가.

지난주 국내 채권시장이 요동쳤다. 3년과 5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주중 한때 연 6%를 돌파했다. 5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2002년 7월 이후 5년4개월 만에 최고치였다.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도 가파르게 올라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사람들의 이자 부담을 크게 키웠다. 이는 펀드 투자 열풍으로 빚어진 은행권의 자금난과 맞물리면서 파장이 증폭됐다.

한국은행이 긴급히 1조5000억원을 투입해 국채 매입에 나서면서 지난 주말 국고채 금리는 5%대로 다시 내려앉았다. 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한은의 개입은 일시적 땜질 처방이란 지적이 나온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 회수와 국내 은행들은 자금 부족이 이어지는 한 시장이 언제 다시 흔들릴지 모른다는 진단이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지급준비금 등을 맞춰야 하는 월말이어서 파장이 일시적으로 증폭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글로벌 프리즘으로 살펴봐야 길이 보인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연장이라는 해석이다. 태평양 건너에서 터진 서브프라임 사태의 불똥 때문에 국내 금융 소비자들까지 이자를 더 물고 자금 조달에 애를 먹어야 할 상황을 맞은 것이다.
 
전염

국내 채권시장이 요동치고 실세금리가 급등한 데는 외국계 은행의 채권 투매가 방아쇠 역할을 했다. 그동안 JP모건과 HSBC 등은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뉴욕과 런던 등에서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으로 한국 국채를 사들였다. 싼 자금을 들여와 상대적으로 비싼 금리를 받는 자산에 투자했으니 남는 장사였다. 더구나 원화 강세로 환차익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뉴욕과 런던에서 자금을 더 이상 끌어오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자금경색이 심해지면서 현금을 챙겨 빚을 갚아야 할 상황으로까지 몰렸다. 결국 한국 채권을 던질 수밖에 없는 국면을 맞은 것이다.

때마침 국내 은행들도 시장에 채권 물량을 쏟아냈다. 펀드 쪽으로 자금이 계속 빠지면서 자금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외형 경쟁을 위해 대출은 많이 깔아놓았는데 예금 이탈로 곳간이 비어가자, 이를 메우기 위해 은행채와 CD를 마구 찍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국내외 은행이 동시에 채권을 던지는데, 받아갈 수요처는 마땅히 없으니 채권 금리가 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서브프라임 사태로 빚어진 글로벌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이 시간차를 두고 국내로 전염되는 현상으로 풀이했다.
 
8월의 추억

지난주 국내 채권시장의 상황은 BNP파리바가 펀드 환매 중단을 선언한 8월 10일 이후 미국과 유럽 자금시장을 연상시켰다. 당시 미국·유럽 금융회사들은 자금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유 채권을 투매하면서 동시에 단기자금 시장에서 마구 현금을 빨아들였다. 미국과 유럽의 국채 수익률이 뜀박질하면서 동시에 단기 자금시장의 금리도 급등했다. 이후 9월에는 영국 주택조합인 노던록에서 예금인출사태(뱅크런)가 발생했다. 인터넷은행이기는 하지만 미 넷뱅크가 자금난에 시달리다 결국 파산을 선언하기도 했다.

시장이 고통을 호소하자 유럽중앙은행(ECB)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긴급 자금을 쏟아 부었다. FRB는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내렸다. 그러나 현재 선진국 시장 자금난은 진정되지 않고 일반 기업 쪽으로까지 계속 번지고 있다. 미 기업의 장단기 차입금이 8월 말 3조3000억 달러였는데, 이달 15일 현재 3조 달러로 9%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1차 오일쇼크인 1973년 이후 가장 빠른 감소세라고 한다. 돈 갈증에 허덕이는 금융회사들이 자금을 회수한 탓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전환사채(CB) 등 변종 증권 발행을 통해 급전을 마련하고 있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미국에서 발행된 CB 물량은 2003년 이후 가장 많은 757억 달러에 달했다.

금융피로

요즘 글로벌 자금시장은 찰스 킨들버거 전 MIT 교수 등이 말한 ‘금융피로(Financial Distress)’현상과 일치한다. 이는 유동성 풍년과 자산버블 직후에 흔히 목격되는 것으로, 먼저 집값과 주가 등 자산 가격과 통화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이어 금융회사 부실 자산이 늘어나고 실세 금리가 급등한다. 또 금융회사가 필사적으로 자금회수에 나서 기업들이 투자를 줄인다. 그 여파로 고용·소비가 감소한다. 앞서 소개한 미 기업의 차입감소는 자금 회수 단계인 셈이다.

조짐이 불길하다고 얘기하는 전문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 미 자산운용사인 노던트러스트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폴 캐스리얼은 “글로벌 금융시장은 중앙은행이 공세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자산가격이 멜팅다운(Melting Down:폭락)하는 사태로 이어지기 충분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금융피로 다음 단계인 패닉(시장 붕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성공적인 불끄기

캐스리얼 등의 경고와 달리 최근 약 30년 동안 금융피로가 패닉으로 실제 이어진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중앙은행과 정부의 신속하고 정교한 시장 개입이 파국을 막은 덕분이다.

2001년 닷컴거품 붕괴를 비롯해 98년 롱텀캐피털 사태, 90년 일본 거품 파열, 80년대 중반 미 대부조합 파산 등이 발생한 직후 금융피로 현상이 발생했다. 이때마다 미 FRB 등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협조·개입해 시장의 패닉을 차단했다. 하지만 선진국 이외 지역에서 발생한 94년 멕시코사태와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1년 아르헨티나 사태는 다른 경로를 밟았다. 선진국들이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시장에 대해선 이를 방조한 측면이 있었고, 오히려 이를 활용해 돈 장사를 톡톡히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맥락에서 전문가들은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사태가 파국으로 비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길어지는 후유증

중앙은행들이 나서 파국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금융피로 현상의 여파인 기업 자금난이나 경기침체는 짧게는 1년 정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이어졌다. 중앙은행의 개입이 패닉을 막은 대신 긴 후유증을 남긴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금융피로 후유증이 일본의 사례처럼 길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자산유동화시장이 발달한 덕분에 금융회사들이 신속하게 부실자산을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유례가 드문 유동성 풍년과 자산거품 이후라는 점에 비춰 롱텀캐피털이나 대부조합 사태 직후보다 후유증이 오래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이런 글로벌 상황에 비춰 지난주 국내 금융시장의 동요는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국내 상황이 8월 이후 선진시장의 궤적대로 진행된다면, 자금난이 금융권을 넘어 빚이 많은 가계와 중견·중소기업으로 번져 실물경제를 압박하는 수순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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