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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뮤지컬 상상해 보셨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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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뮤지컬 ‘행복한 왕자’의 5개월 간 스튜디오 실험이 끝나는 26일, 제작팀이 골판지로 접어 만든 코끼리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고선영 기술감독, 김종헌 프로듀서, 한수연 무대감독, 이영란 연출가, 엄철호 조연출. [양영석 인턴기자]

 “행복한 감금이었어요. 다시 하라면? 글쎄요, 자신 없는데요.”

 26일 저녁 서울 동숭동. 철거를 앞둔 을씨년스런 교회 안에서 때아닌 ‘쫑파티’가 열렸다. 뮤지컬 ‘행복한 왕자’ 제작팀이 5개월 간의 스튜디오 실험을 이날 끝마친 것. ‘감금’이란 표현을 쓴 것은 5개월 간 단 하루도 못 쉬고, 매일 아침 10시에 나와 12시간씩 꼬박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극본·무대·연출을 맡은 이영란(41)씨는 “원래 예술가란 족속들이 자유분방한 터라 이렇게 꽉 매여서 일해 본 적이 없죠. 생전 처음 출근 도장 찍어가며 직장에 다닌 기분”이라고 말했다.

종이로 만든 ‘행복한 왕자’. 배우이면서 무대 장치 역할도 한다.

바닥엔 습자지·한지·골판지 등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구석구석 이상한 형태의 모형들도 눈에 띄었다. 어떤 건 코끼리처럼 생겼고, 돼지 형상을 갖춘 것도 있었으며 제비들이 줄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모든 모형들은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신개념 뮤지컬 장르인 ‘페이퍼(paper) 뮤지컬’이 용틀임을 하는 순간이었다.

 #접고 오리고 태운다

 ‘페이퍼 뮤지컬’을 표방하고 나선 건 세트와 소품 등을 전적으로 종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김종헌(40) 프로듀서는 “다양한 종이 모형만으로 무대를 채운 경우는 국내는 물론,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도 없었다. 세계 최초의 새로운 무대 언어인 셈”이라고 자신했다.

 단순히 겉모습만이 아니다. 종이의 속성을 100% 활용한다. 두꺼운 골판지를 이리저리 척척 ‘접으면’ 코끼리 모형이 완성된다. 유럽의 한적한 오두막집처럼 생긴 무대 세트는 종이를 군데군데 ‘뜯어내’ 운치있는 질감을 표현해 냈다. 하늘거리는 습자지를 조각조각 ‘붙여’ 거대한 눈사람을 빚어냈으며, 빛이 ‘투영’되는 특성은 그림자극으로 변모시켰다. 뚝뚝 흘리는 왕자의 눈물 역시 종이가 ‘탄’ 자국으로 형상화된다. 구겨지고, 오므라들고, 돌돌돌 말아올라가 쫙 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종이로 할 수 있는 모든 ‘짓거리’를 몽땅 무대화한 셈이다.

 이를 위해 동원된 종이량은 5톤 트럭 두대 분량. 사흘에 한번씩 종로 방산 시장에 들러 쇼핑을 했다. 지금껏 실험된 종이 가짓수는 11종류에 이른다. 이영란씨는 “5개월 간 끊임없이 종이와 대화를 나눴다. 내가 알지 못하던 성질들을 종이가 속삭이듯 내게 들려줬다”고 말했다.

 #단계별로 진화해간다

 제작 과정의 선진화라는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각별하다. 오스카 와일드 원작으로 자기 희생의 가슴 찡한 스토리인 ‘행복한 왕자’가 기획된 것은 지난해 10월. 일본 시키 극단의 ‘라이온 킹’ 개막 공연을 본 김종헌 프로듀서가 “‘라이온 킹’처럼, 독특한 무대 미학을 갖춘 창작 뮤지컬을 만들 수 없을까”라고 궁리했고, 이를 ‘가루야 가루야’ 등 물체극으로 유명한 이씨에게 제안하면서 작업은 출발했다.

대본 초고가 나온 건 4월경. 이후 ‘종이’란 컨셉트를 정한 두 사람은 5개월 간의 ‘스튜디오 실험’을 통해 밑그림을 완성했다. 내년 상반기엔 실제 무대 제작과 음악·조명·의상 등의 작업이 병행된다. 이후 6월경 실제 공연장으로 무대 세트를 들고 가, 아마추어 배우들과 함께 2개월 간 작품을 정밀하게 다져가는 ‘극장 실험’을 거치게 된다.

 10월엔 2주 가량 트라이아웃(try-out, 본 공연에 앞서 지방에서 모의 공연을 진행하는 것)을 실시한다. 서울 공연 개막은 2009년 상반기로 예정돼 있다. 김 프로듀서는 “작품 밀도가 우리 욕심만큼 안 나오면 개막은 더 늦춰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기존 창작 뮤지컬이 우선 극장을 잡고선 완성도야 어찌됐건 무조건 작품을 올리고 보는, 주먹구구식 제작 방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셈이다.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한국 뮤지컬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는 ‘행복한 왕자’는 지금, 두 번째 계단을 밟고 있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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