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공계 붕괴를 막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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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이공계 위기 의식이 생겼는가. 미래에 우리가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를 생각할 때부터였다. 세계적 일등상품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에 대학의 이공계 지원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이에 정부는 병역특례, 장학금과 유학 지원, 공기업 과학기술전공자 채용 목표제 등의 당근 정책으로 이공계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대학 입시에서는 이공계를 살리기 위한 정책적 배려가 없어 매우 걱정스럽다. 고교 자연계는 인문계와 비교할 때 언어와 외국어의 주당 수업시간이 적은 데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의 문제와 배점은 동일하다. 반면 수리탐구를 평가하는 수리영역의 문제는 학습시간의 차이만큼 이공계와 인문계가 서로 다르다.

모든 것을 서열화가 가능한 양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수리정보는 언어와 영상 정보에 비해 사안을 더 깊게 분석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성질을 탐구하면서 소수점 이하 몇 자리를 더 밝히게 되면, 이는 짧은 순간의 상황을 통제하는 과학기술로 이어져 정교한 세계적인 상품 생산에 기여할 수 있다.

국가가 이공계를 살리려는 이유를 한꺼풀 벗겨보면 과학기술이 필수적인 상품 생산력과 합리적 사고에 의한 기획력 향상에 수리학문의 탐구 역할이 특별히 필요해서다. 우리 나라는 현재 일등상품 생산을 위해서는 이공계를 살리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공계를 죽이는 데 열중하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이 처음으로 적용되는 2005학년도 입시안이 그 대표적 사례다.

바뀐 수능은 사탐.과탐.직탐.수리 등 네 영역에서 다양한 심화과목들의 난이도를 해소하기 위해 원점수 없이 표준점수와 백분위로만 평가한다. 여기까지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수능 자연계열에서 과탐.사탐.직탐영역, 수리영역의 '가''나'형 혼합평가는 선택과 집중이란 7차 교육과정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또 대학의 이공계 전공에 꼭 필요한 심화된 선택과목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한다.

특히 수리영역의 문제는 심각하다. 수리영역은 기존의 고교 자연계열을 약화시킨 '가'형, 인문.예체능 계열을 묶은 '나'형으로 구분되고 '나'형의 시험범위는 '가'형의 일부다. 거의 모든 학생이 수리에 응시하지만 두 응시집단의 마음 자세와 성적 분포는 판이하다. '가'형 응시집단이 우수한 정예부대라고 한다면 '나'형 응시집단은 대학입시에 꼭 사용한다는 보장 없이 그저 시험 보는 오합지졸이다. 그러므로 동일인이 '가'' 나'형을 각각 치를 때 '나'형 응시가 표준점수와 백분위 평가에서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대교협 발표에 따르면 의대를 포함한 자연계열에서 28개 대학만이 수리 '가'형을 요구한다. 또 1백45개 대학이 '가''나' 혼합형을 요구하고, 그 가운데 일부 대학이 '가'형 응시자에게 약간의 가중치를 부여하겠다고 한다. 2005학년도 대학별 입시요강은 오는 3월께 결정된다. 학생들은 수능 응시원서를 내는 9월께 시험과목을 선택하게 된다. '나'형이 태풍 같은 위력으로 '가'형을 잠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수리학문 심화학습이 필요한 이공계 살리기에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는 사안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날 조기경보를 외면하고 현재의 카드문제를 초래한 당사자들인 카드 사용자.카드사, 경제정책 책임자와 비슷한 상황에 고등학생.대학교.교육정책 책임자가 놓여 있는 셈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카드 고객 수를 늘리겠다는 단견과 부실한 감독 기능이 심각한 카드문제로 이어졌음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공계 살리기에 여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공계는 정작 속으로부터 붕괴할 조짐이 엿보인다. 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산이 아니라 정책 책임자를 비롯한 당사자들의 앞을 내다보는 기획력이다. 소를 잃고 난 후에 외양간을 고치려고 법석을 떨 것인지, 아니면 조기경보를 듣고 외양간을 먼저 고칠 것인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때다.

문권배 상명대 교수.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