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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99.5共청산 비밀보고서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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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5共청산 비밀보고서의 내용처럼 6共 청와대는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청산작업에 들어갔다.청산작업은 궁극적으로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의 고해성사를 강요하는 연희동 압박작전이었다.
보고서는 압박작전의 전술을 대강은 미리 구상해두었다.
보고서를 보면 정국운영의 기본전략으로「올림픽이후 야당의 정치적 공세에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해 정국(5共비리특위 활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돼있다.적극적인 대응중 가장 중요한 것은 6공 자신의 몫이 아니라 5공 비리의 주인공 全전대 통령의 몫,즉 對국민사과.재산헌납.낙향이었다.
이같은 결론이 불가피한 배경을 설명한 대목이 흥미롭다.보고서는「정치는 반드시 진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현상을 그 대상으로 하므로 설령 허물이 없더라도 국민이 믿지 않으면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공개하고 물의를 야기한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정도(正道)」라며「자진해명등의조치가 없는 것에 대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여론」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가 진실보다 현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인식은「진실을 밝힌다」는 측면보다「현상이 나타나면 진실과 다르더라도 응급처방이나마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강해 공작적인 정치관이 아닐 수없다.비록「현상」의 하나로「여론」을 강조하고 있지 만 여론을 존중한다는 의미보다 조종.조작하고자 하는 의도가 짙게 배어있다는 뜻이다.
진실을 전부 터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등하는 5공 청산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는 6공 정부의 고민과 진실이 밝혀질 수없는 후진 정치현실이 느껴 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6공 청와대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순되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쫓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마리는 앞서와 같이 비등하는 여론을 가라앉히는 것이고,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5공과 함께 6공이 공멸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기본적으로 6공이 같은 뿌리인 5공을잘라내면서도 스스로 상처를 입어선 안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6공 청와대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같은 뿌리」,그것도「썩은 뿌리」임이 드러날 수 있는 정치자금 문제였다.5공의 정치자금이란 다름 아닌 6공 탄생의 밑거름,대통령선거 자금이었기에「같은 뿌리」임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부 분이다.더욱이 정치자금치고 구린내나지 않은 돈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돈줄이 드러난다는 것은 곧 5,6공의 공멸을 의미했다.
6공 청와대관계자 X씨가「全전대통령의 정치자금줄이 드러나 허겁지겁 덮느라고 당황했던 일」이라고 밝힌 에피소드는 이같은 정치자금의 폭발성을 말해준다.
全전대통령과 별 관계가 없던 기업에 대한 국세청의 조사과정에서 全전대통령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부분이 드러났다.대구출신인 서영택(徐榮澤)국세청장이 돈과 관련된 문제인지라 이원조(李源祚)의원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李의원은 다시「숨이 다 넘어가는목소리로」최병렬(崔秉烈)청와대정무수석에게 전화를 걸었다.李의원이 전화를 건 이유는『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자문이었지만 여기에는『혹시 나도 모르게 청와대에서 全전대통령의 돈줄을 일부러 건드리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은밀한 의사타진이 담겨 있었다.청와대에서 미리 全전대통령의 돈줄임을 알고 조사를 지시해 자연스럽게 돈줄을 드러내는 우회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崔수석은『큰 일 난다』며『덮어두라』고 주문했다.그바람에 그 기업에 대한 국세청의 조사가 중단되기도 했다고 한다.
보고서는 全전대통령의 자진해명.사과 시기를「올림픽이 끝나고 특위활동에서 어느 정도 여과과정을 거친후 국정감사가 끝날 무렵」으로 건의하고 있다.
6공 청와대는 보고서와 같이 정국을 끌어가기 시작했다.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유신이후 16년만에 부활된 국정감사 하루전인 10월4일 국회연설에서『헌정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全전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연설을 했다.그러나 사실 6공 정부는 보고서의 건의 처럼 국정감사를 통한 여과효과를 기대했던듯 하다.
여과효과가 가장 높았던 극적 이벤트는 全전대통령 부인 이순자(李順子)여사의 공직사퇴였다.李여사와 관련된 새세대육영회와 새생명심장재단 문제는 국정감사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문제가 되었다.「거액기부금조성」과 관련된 의혹이었다.문제가 계속되자 6공측은 李여사의 회장직 사퇴를 요청했다.
***처음부터 감정으로 6공 관계자 Q씨는『청와대에선 처음에문제를 쉽게 생각했었죠.그런데 李여사가 몇차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완강히 거부했습니다.그자리가 상당히 권세부리는 자리였으면 오히려 쉽게 사퇴했을 거예요.李여사는『내가 뭐덕보려고 이 일을 하는거냐.좋은 일 하는 순수봉사단체인데 왜 내놓으라고 하느냐』며 항변했죠.워낙 감정적으로 강하게 반발하니주위에서 아무도 못말리더군요.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라고기억했다.
5공의 측근 Z씨 역시 『李여사는 평소 자신이 해온 일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죠.그러니 회장직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억울했던거죠.全전대통령은 신문을 거의 보지 않지만 李여사는 몇시간씩 신문을 정독합니다.그러니 당시 언론 이나 정치권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어요.이때문에 주위에서「감정적으로 반응을 보이면 좋지 않다」고 만류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죠.기자회견문도 본인이 직접 작성했습니다』라고 기억했다.
그 결과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10월14일 李여사의 기자회견은식지않은 감정이 그대로 뿜어져 나왔다.李여사는 회장직 사퇴를 밝히는 회견중 『저는 전직대통령 부인이니까 잘못이 있어도 눈감아주자라는 억지논리와 구차한 비호를 단호히 거부 합니다』라고 말한 뒤 『파헤치십시오.철저하게 파헤치십시오』라고 달려들었다.
그리고는『7년반(집권기간)보다 더 긴 7개월(퇴임후 기간)』『절망에 가까운 슬픔』등의 표현으로 그동안의 심경을 밝혔다.
***1시간 넘도록 高聲 李여사는 얼마후인 11월2일 청와대의 새 안방마님 김옥숙(金玉淑)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퇴임후 거의 연락이 없던 내실간의 통화는 약 1시간 넘게 계속됐으며,상당히 흥분된 어조의 고성도 오갔다고 한다.당시 李여사는 『우리가 이럴 사 이가 아닌데 이럴 수 있느냐』면서 자신의 문제뿐아니라 이미 예정돼 있던 친.인척의 구속문제에 대해서도 강하게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Z씨에 따르면 李여사는 통화후 『그동안 쌓였던 얘기 다했다.
옛날 김옥숙이 아니다.변해도 너무 변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5,6공 사정에 정통한 T씨는 『5,6공 갈등의 절반은 李.金 갈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그는 『내실간의 갈등은 여자들사이의 묘한 자존심경쟁이 깔려있게 마련이죠.李.金 두사람모두 자존심이 대단합니다.특히 金여사는 李여사에 비해 전혀 모자라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럴만한 배경은 여러가지가 있죠.우선 金여사는 나이도 李여사보다 많은데다(全전대통령은 盧전대통령보다 1살 많지만 李여사는 金여사보다 4살 적다)대구의 명문가,특히 교육자집안(큰 오빠 진동씨는 입시학원 원장,둘째 오빠 익동씨는 6공기간중 경북대 총장,셋째 오빠는 김복동 의원)이라는데 자부심이 강해요.본인 역시 대구명문인 경북여고.경북대를 나온데다 훤칠한 키에 미모까지 갖췄으니까요.그런金여사니 남편 계급 따라가는 군인사회에서 李여사를「형님」이라 부르며 뒤쫓아가면서 자존심이 꽤 상했겠죠』라고 심리를 분석했다. ***현직大統領이 상전 그는 이어 『그래도 군시절에는 별 문제가 없었죠.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사이였으니까요.문제는 5공들어 全대통령이 盧대통령에게 대권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쌓이기시작한 섭섭한 감정때문이죠.결정적으로 감정이 폭발한 것은 6공이 들어서면 서부터죠.金여사는 「이제 우리가 현직대통령이니 더상전」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그때부터 金여사는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그런 金여사의 태도변화를 李여사로서는받아들이기 힘들었겠죠.그게 5공 청산과정에서 더욱 쌓였죠.
全대통령과 盧대통령간에도 이와 비슷한 감정의 흐름은 있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국정감사기간중 만만찮은 거부반응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의 여과과정」을 거친 6공 청와대는 보고서의 건의처럼 국정감사가 끝나자마자 본격적인 연희동 압박작전에 돌입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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