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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중년남자의 '폐경' 어떻게 넘길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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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1. 1백세까지 살다 1996년에 사망한 미국의 희극배우 조지 번스. 아내가 죽고 거의 여든이 돼 코미디언 생활을 시작한 그는 NBC로부터 5년 장기 출연계약을 제의받고는 "5년 후라니! 그때도 당신이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있어?"라고 농담을 던졌다. 정확히 2년 후, NBC의 모회사인 RCA가 GE사에 인수되는 운명을 맞았으나 번스는 그 후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났다.

#2. 아흔네 살의 한 남자가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생겨 의사를 찾았다. 마흔여덟 살이던 의사는 "아흔네 살의 나이에 뭘 더 바랍니까?"라고 환자를 나무랐다. 그러자 그 남자 환자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내 왼쪽 무릎도 아흔네 살이 됐지만 아주 잘 돌아가고 있소."

미국의 여성 정치 평론가이며 언론인인 게일 쉬히가 쓴 '남자의 인생 지도'(원제 Understanding Mens Passages)는 한마디로 '남성 폐경'에 관한 보고서다. 하지만 폐경을 생물학적으로 파고드는 이론서는 아니다. 중년 이상 남자들이 테스토스테론 등 호르몬 분비의 저하로 인해 경험하는 육체적.성적.정신적.사회적 '노쇠'현상과 그것을 극복해가는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그러나 위의 에피소드에서 보듯 적어도 이 책에서 만나는 중년 남자들의 육성은 참으로 밝다.

국내에서는 남자에게도 폐경이 있느냐를 놓고 논란이 전개되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남자에게도 폐경이 있다는 학설이 정설로 통한다. 아직 폐경을 대체할 만한 다른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해 남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폐경으로 표현된다.

저자가 수백 명의 남자를 만나 얻은 결론은 이렇다.

"폐경기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나이 먹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매사에 활력과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다. 익숙한 것과 과감히 결별하고 도전의 길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포용력과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친화력이 필요하다."

남자들 역시 폐경을 맞으면 우울증 등을 겪지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은 역시 성욕의 급격한 저하다. 성욕 저하를 무시하거나 그 현상에 저항하려 들면 그 영향은 중년 이후의 생활 전반에 미친다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성능력을 직시하는 것이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첫 단추인 셈이다.

저자는 남성들에게 권위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지라고 주문한다.

"마흔 살을 넘어설 경우 남자들이 여성들보다 적응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 여자는 나이가 들면 걱정을 하지만, 남자는 나이가 들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의 첫째 원인은 급격히 떨어지는 것 같은 정력이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이라면 그 어려움은 더하다. 우리의 인생이 곧게 뻗은 직선길로만 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직선이 아닌 길도 있고, 그 길 뒤에도 새로운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지금까지 가지 않은 길이라도 서슴없이 밟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남자들의 폐경은 대충 언제 시작할까. 생물학적인 나이가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머리가 빠지는 것이 맘에 걸리기 시작하거나, 흔히 하는 농담처럼 아내의 샤워 소리가 부담스럽게 들릴 때면 대충 폐경기에 들어선 것으로 알면 된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강하게 다가올 때가 폐경기의 시작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약간만 바꿔도 스트레스를 팍 죽일 수 있다. 예컨대 대머리 문제는 이렇게 접근하면 마음이 편하다. 사람이 일평생 머리를 빗고 말리고 손질하는 데 들이는 시간이 장장 7~8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대머리를 고민할 시간을 알찬 일에 투자하게 되지 않을까. 폐경기에 나타나는 현상 자체보다 그 현상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양성 평등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중년 남자들의 경우 남성다움에 대한 재정의도 절실하다.

돈이나 승진 등의 보상을 얻기 위한 경쟁관계보다 많은 사람과 동반자 관계를 맺고, 또 봉사 등 의미 있는 활동으로 내면의 평화와 성취를 높이는 것도 아이디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면 중년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고 자신의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편 여성 우월적인 시각이 곳곳에 보여 거슬린다. 남성은 여성보다 죽음을 더 무서워한다든가, 남자들은 여자와 달리 변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대목에서는 지나치게 남성을 정형화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성공 사례로 꼽히는 사람 대부분이 경제력을 갖추고 있어 과연 보통사람들이 폐경기를 넘기기 위해 벌이는 몸부림을 온전히 담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럼에도 남녀 불문하고 이 책에서 얻을 것은 많다. 남자 독자라면 꼭 중년이 아니어도 이 책에서 남녀 역할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나이듦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반면에 여성 독자들은 자신의 남편이나 아버지, 혹은 이런 저런 중요한 인연을 맺고 있는 중년 남자들이 드러내놓지 않는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의 눈으로 남성의 폐경기를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여성 독자들에게 더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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