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해외여행낭패기>베를린行 야간침대열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지난 여름 두달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왔다.지난 5년동안 8개월이 넘게 해외여행을 했기에 나름대로는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충분히 헤쳐나갈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베를린행 야간침대열차에서 무참히 깨져버렸다.마취 강도들이「방심이 사고를 불러일으킨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베를린은 빔 벤더스감독의 영화『베를린천사의 시』를 보면서 반드시 들러보리라 다짐했던 해외여행지였다.오후 11시 암스테르담을 출발해 오전 7시30분 베를린에 도착하는 야간침대열차에서 운좋게도 6명이 정원인 침대칸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해외여행을 할 때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안전수칙이 몇가지 있다.처음에는 안전수칙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번 여행때는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여권.비행기표.카드.현금을 지갑에 한꺼번에 넣어둔 것이 화근이 돼 결국은 일정도마치지 못하고 귀국하는 우를 범하게 됐다.
오전 1시쯤 역무원이 유레일패스를 검사하러 들어왔기에 지갑을열고 패스를 꺼내 보여주었다.아마 그때 역무원이 지갑 속의 두툼한 현금을 본 것 같았다.한국에서 출발하기 전날 환전을 하면서 TC로 바꿀까 생각했었다.그러나 뉴욕맨해튼 피자가게에서 20달러 체크를 받지않아 피자 한조각을 먹기 위해 수십분을 걸어야 했던 생각에 모두 현금으로 바꿨다.
유레일패스 검사를 받은 뒤 지갑을 가방 속에 넣고 잠을 청했다.잠결에 문을 여는 소리가 났고 무의식적으로 역무원 복장을 한 사람에게 유레일패스를 보여줬다.그것이 세차례나 반복됐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했다.새벽에 일어나서 가방을 찾았다.제자리에 있었다.그런데 지퍼를 열자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베를린에 도착해 경찰서에 분실신고를 하고 한국영사관에서 여권재발급 신청을 했다.베를린에서 20년을 살았다는 교민 아주머니가 딸의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나왔다가 당황한 나를 보더니 아무 조건없이 돈을 빌려주었다.결국 예정했던 여행 의 반도 채우지 못한 채 귀국해야만 했다.
河在鳳(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