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慶에 온 시인 毛澤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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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26면

마오저둥은 1945년 8월 28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칭 회담 기간 중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9월 16일 미국 조종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마오(왼쪽 사진 가운데). 마오저둥은 1936년 장정 중 자신이 직접 쓴 ‘沁園春.雪’을 그 후 45년 총칭 담판 때 만난 시인 류야즈에게 다시 써 건네주었다(오른쪽 사진). [김명호 제공]

1945년 8월 10일 소련 홍군이 중국의 동북지역에 진입해 관동군을 괴멸시키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중국은 전승국이 되었다. 모든 불평등조약은 폐기되었고 5대 강국의 하나로 국제적 지위가 상승했다. 남은 일이라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부강한 중국을 건설하는 것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나 국공(國共) 양당이 합작해 치른 8년의 전쟁 동안 공산당은 점령지역에서 국민정부의 통치력을 와해시켰고 전쟁 초기 5만 명에 불과했던 군사력도 약 130만 명까지 늘었다. 국민당 군정계통에도 상당수의 공산당 비밀당원이 있었고 일부는 지휘계통 핵심부까지 침투해 있었다. 전후의 통화팽창과 부패도 극에 달해 내전은 시간문제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6>

미국은 국공 양당의 회담을 주선하며 장제스를 압박했다. 장은 8월 14일부터 세 차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마오저둥에게 전보를 보내 총칭(重慶)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했다. 공산당도 국민당과 기타 민주당파와 함께 협의해 단결을 공고히 하고 통일의 실현을 희망한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45년 8월 28일 마오는 중국 주재 미국대사 등과 함께 근거지 옌안(延安)을 떠나 임시수도 총칭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타본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평화를 위해 왔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장 위원장 만세”를 불렀다. 첫날부터 두 사람은 같이 사진 찍고 서로의 숙소를 방문해 산책하며 무려 43일간 기(汽)싸움을 벌였다.

회담 기간 마오는 외교사절을 비롯한 각 방면의 인사들과 폭넓게 접촉했다. 특히 시인 류야즈(柳亞子)와의 만남을 즐거워했다. 마오는 자신의 시(詩) 한 편을 붓으로 써서 류에게 선물했다. 36년 장정 도중에 쓴 ‘沁園春.雪’이라는 작품이었다.

북녘의 風光은 千里에 얼음 덮이고, 萬里에 눈발 날리네.
바라보니 長城 안팎은 망망한 白雪 天地,
大河의 상·하류 할 것 없이 도도한 기세 이뤘다.
山은 춤추는 은색의 뱀이런가. 高原은 내달리는 밀랍의 흰 코끼리,
저마다 하늘과 키를 겨루려 하네.
이제 다시 날이 개면 붉고 흰 옷차림의 모습은 유난히도 아름다우리,
이토록 아름다운 江山이기에 수많은 英雄들도 다투어 허리 굽히게 하였네.
아쉽게도 진시황과 한무제는 文彩가 모자랐고, 당 태종과 송 태조는 詩에 손색이 있었다.
一世를 풍미하던 하늘의 아들 칭기즈칸도 활 당겨 독수리나 쏠 줄밖에 몰랐거니.
그러나 이 모두가 지나간 일,
정녕 風流人物 꼽으려거든 오히려 이 時代를 보아야 하리.

류도 즉각 화답하는 시를 보냈다. 마오는 이에 다시 답하며 “우리의 앞날은 밝다. 그러나 수많은 곡절이 따를 것이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류는 마오가 총칭을 떠난 후 신화일보(新華日報)에 ‘沁園春.雪’과 자신의 화답시를 발표했다. 소설가 짱한수이(張恨水)도 “潤芝(마오의 字)가 詩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沁園春.雪’을 읽다 보면 풍격의 독특함을 알 수 있다”며 자신이 주간이던 신민보(新民報)에 마오의 시를 게재했다. 대공보(大公報)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詩와 평론이 3일 연달아 실렸다. 사람들 모이는 곳마다 마오의 시가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암송하고 곡을 붙여 노래하며 마오야말로 진정한 “風流人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국민당 통치지역의 지식인들 중에는 마오에 관해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정 도중 구이저우(貴州)에서 마오타이주(酒)에 발을 닦았다며 산채의 두령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장제스도 ’沁園春.雪’이 딴 사람의 작품을 도용한 것은 아닌지, 마오가 쓴 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열광하는 만큼 빼어난 작품인지를 측근에게 여러 차례 물었다고 한다.

총칭 담판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실패한 회담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미래의 지도자로 누가 적합한가를 저울질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누가 더 ‘매력’이 있느냐다. 담판 기간 동안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마오에게서 그 매력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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