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계 공연장 순례] 암스테르담 뵈르스 판 베를라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내려 도심으로 들어가려면 담락(Damrak)이라는 큰 길을 지나야 한다. 5분쯤 걷다보면 왼편으로 붉은 벽돌로 된 고색창연한 건물이 눈에 띈다. 뵈르스 판 베를라헤(Beurs van Berlageㆍ이하 BvB). 암스테르담 태생의 건축가 헨릭 베를라헤(1856∼1934)가 설계한 거래소 건물이라는 뜻이다. 상품과 증권 거래소에서 출발해 나중엔 어음, 외환, 화물, 보험, 옵션를 사고 팔았다. 1903년 개관 당시의 이름은 Koopmansbeurs(상품거래소라는 뜻). 1988년 농산물 선물 거래를 마지막으로 BvB는 거래소 기능을 마감했다.

BvB 덕분에 담락은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처럼 암스테르담 금융가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바로 옆에 1912년 개관 9년만에 공간이 비좁아 새 건물을 지어 이사한 증권거래소(현재의 유로넥스트 암스테르담)가 자리잡고 있다.

암스테르담 시는 거래소 건물의 절반을 음악당으로 개조했다. 1987년 증권거래소 자리를 개조해 534석짜리 ‘야쿠르트 홀’로 꾸민데 이어 1990년에는 옥수수 선물 거래가 이뤄지던 공간에 유리 상자 모양의 음악홀‘유리 음악당’(230석)을 마련했다. 각각 네덜란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네덜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무대 겸 연습 공간이다.

네덜란드 필하모닉의 새 보금자리

네덜란드 필하모닉은 단원 130명으로 네덜란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985년 네덜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1995년 창단), 암스테르담 필하모닉(1953년 창단), 우트레히트 심포니(1894년 창단) 등이 합병한 단체다. 네덜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네덜란드 필하모닉 재단 소속이긴 하지만 따로 자체 연주를 해오고 있다.

네덜란드 필하모닉은 그동안 몸집을 키우긴 했지만 마땅한 연습 공간이 없어 떠돌이 신세였다.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가 해외 순회공연을 갈 때 콘서트헤보에서 연주해오고 있다. 네덜란드 국립 오페라의 반주를 맡을 때는 암스텔 강변에 있는 음악극장에서 연습하지만 자체 정기연주회를 위한 연습 공간이 없어 애를 먹기 일쑤였다. 네덜란드필이 연습실을 찾던 중 눈길이 멈춘 곳이 바로 BvB였다. 때마침 야쿠르트 사에서 네덜란드 필하모닉과 네덜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공식 메인 스폰서로 나섰다.

BvB 건물의 북쪽은 네덜란드 필하모닉 재단, 남쪽은 BvB 재단이 운영을 맡아오고 있다. 주로 북쪽에는 음악회, 남쪽에는 전시회가 열리지만 만찬이나 리셉션 등 각종 이벤트는 건물 곳곳에서 열린다.

네덜란드 필하모닉의 연습실 겸 무대인 ‘야쿠르트홀’은 증권거래소, 암스테르담 시립 어음 교환소로 쓰던 곳이다. 700㎡의 크기에 천장 높이는 20m다. 타일 벽화는 네덜란드의 상징주의 화가 얀 투로프(Jan Toorop. 1858∼1928)가 그린 것으로 노동의 여러 과정과 형태를 묘사한 것이다.

시립 거래소 건물을 콘서트홀 겸 이벤트 홀로 개조

네덜란드 체임버의 연습실 겸 무대인 ‘옥수수 홀’은 ‘유리 음악당’ 이라고도 하는데 이 연주단체의 메인 스폰서인 부동사 펀드회사의 이름을 따서 공식 명칭은 ‘암베스트 홀(Amvest Hall)’이다. 1974년 옥수수 거래가 중단되면서 선물 거래소로 바뀌었다. 1987년 BvB에서는 마지막으로 농산물 거래가 이뤄진 곳이다. 옥수수의 품질을 꼼꼼히 살펴보기 위해 자연광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아치형의 둥근 지붕이 특징이다. 타일 벽화는 인간의 노동을 주제로 한 것으로 옥수수를 추수해서 가루로 빻아 빵을 만들어 먹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암베스트 홀을 유리음악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마치 상자 안의 상자 모양처럼 300㎡의 공간 안에 넓이 175㎡짜리 유리 상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건물의 천장 높이는 14m로 유리 음악당의 천장 높이는 10m다. 공간의 크기는 13×22×10㎥. 두께 8㎜의 강화 유리를 사용해 외부 소음을 차단했다. 음향의 고른 반사를 위해 한쪽 벽면은 곡선으로 처리했다. 만찬이 열릴 때는 140명(유리 음악당 안에는 8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리셉션 파티는 250명까지 수용 가능하다. 콘서트 외에 심포니엄, 파티, 무도회, 만찬 행사가 열린다. 외부 대관 사업은 네덜란드 필하모닉 재단의 수입원이기도 하다.

날씨가 흐려 실내 조명이 어두우면 바깥으로 나와 옥수수 상태를 확인하면서 거래를 할 수 있게 안마당까지 딸려 있었다. 나중에 뒷마당에는 높이 5m의 천장을 씌워 ‘아사이 홀’을 만들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보 도서관으로 사용했는데, 요즘엔 만찬과 회의가 열린다. 유리 창문으로는 북쪽의 암스테르담 중앙역, 운하를 오가는 유람선, 홍등가를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BvB가 암스테르담 시민들에게 완전히 개방된 것은 1995년부터다. BvB 건물의 남쪽은 만찬, 리셉션, 결혼식 다채로운 이벤트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때 선물 거래소의 전신전화국이 자리잡고 있던 로비는 유리 돔 지붕이 특징이다. 만찬(200명)과 리셉션(450명) 장소로 사용된다. 벽면에는 네덜란드 시인 알버트 베르베이가 쓴 글귀가 벽에 새겨져 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세계가 열린다. 바깥으로 뻗은 선을 따라 하고 싶은 말이 빠른 속도로 퍼진다.’

자본주의의 요람에서 시민문화궁전으로

메인 홀은 구리ㆍ커피ㆍ목화를 사고 팔던 선물 거래소 장소다.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었다. 지붕은 2중 유리로 되어 있다. 타일 벽화는 ‘과거’‘현재’‘미래’등 세 작품이다. 발코니에는 머큐리 조각상이 서 있다. 머큐리는 상인과 도둑의 신이다. 정치 행사나 대형 파티, 결혼식, 전시회, 만찬이 열린다. 600∼1275명을 수용할 수 있다. 2002년 윌렘 알렉산더 황태자와 황태자비 막시마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메인 홀의 지하는 철제 벙커로 된 귀중품 보관소 자리다. 2001년부터 공예품과 건축 디자인을 위한 전시장과 만찬, 리셉션 장소로 사용된다.

옥수수 거래소와 증권 거래소, 메인 홀 사이에 있는 작은 복도(Arke Foyer)는 전화국 카운터가 마련돼 있던 곳인데 시계가 걸린 벽면에는 시인 알버트 베르베이가 쓴 연작시 ‘계단’‘상인’‘전화’가 새겨져 있다.

BvB을 출입하던 이용객들이 드나들던 카페는 원래 옆 건물에 있었다. 나중엔 연필, 펜 등 필기구를 파는 문방구로 바뀌었다. 암스테르담 시민들이 파커 만년필을 사기 위해 들리는 곳이다. BvB에 새로 들어선 카페는 낮에는 커피와 음료, 밤에는 뷔페 만찬(150명), 리셉션 파티(225명)를 연다. 카페 윗층인 베를라헤 홀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카펫이 유명한데 18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 컨퍼런스홀이다. 옥션 룸도 강연회(155명), 만찬(90명) 장소로 사용된다.

베를라헤는 취리히에서 프리드리히 젬퍼에게 건축을 공부했다. 젬퍼는 드레스덴 오페라 하우스의 건축가. BvB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 아치를 사용하고 벽돌과 사암 등 전통적인 재료를 그대로 표현하면서 불필요한 장식은 과감히 생략했다. 유일한 장식물은 탑에 있는 대형 시계다. 시계탑에는 ‘때를 기다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서두르지 말되 기회가 오면 재빨리 잡으라는 뜻이다. 오후 1시30분 하루 거래를 시작하면서 종을 쳤는데 요즘은 오전 9시에 친다.

베를라헤는 ‘환경 친화적’ 건물을 짓는데 관심이 많았다. 19세기 암스테르담에 들어선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고딕이나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하지 않고 전혀 독자적인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했다. BvB의 세 모서리에는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를 세운 전설적인 인물 헤이스브레흐트 반 암스텔, 17세기의 네덜란드 장군 얀 피터스존 쿤, 국제법의 대가 휘호 그로티우스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건물 벽면에서 튀어 나오게 만들어 모습을 부각시키지 않고 건물의 파사드를 파서 새겨 넣어 건물과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당시만 해도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베를라헤는 계단, 정문, 조각상 등은 건물 파사드와 한 몸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겉보기에 건물이 밋밋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박한 디자인…시계탑이 유일한 장식물

개관 당시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멋대가리 없는 공룡’이라는 비난을 하는가 하면 ‘소박하면서도 당당한 건물’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엔 거래소 건물이라면 매우 웅장하고 위압적인 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를라헤의 건물은 이와는 달리 수수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외부 장식이 거의 없어 거의 사회주의식 건물처럼 보인다.

20세기초 유럽엔 공산주의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베를라헤도 이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심취했었다. 건물 곳곳에 새겨 넣은 조각과 벽화를 그린 화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문 출입구 아치 위에 람베르투스 사일(Lambertus Zeil)이 그린 부조 벽화 의 제목은 ‘낙원, 미래, 그리고 스러져가는 문화’다.

정문 로비에 있는 타일 벽화는 얀 투로프가 그린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다. 칼과 여자를 맞바꿔 사고 파는 과거, 여성이 해방되는 현재, 여성과 남성이 함께 춤을 추는 미래를 그렸다. 1906년 증권업자들은 이 그림을 철거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베를라헤가 자본주의 꽃인 거래소의 건물 설계를 맡긴 했지만 그는 언젠가 자본주의가 몰락하리라고 믿었다.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사회주의 세상이 오면 시민 모두가 자기가 지은 건물에 모여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베를라헤의 소망대로 BvB는 시민문화궁전으로 탈바꿈했다.

1960년 안전진단 결과 건물 바닥이 내려앉고 있었다. 원래 BvB가 들어선 곳은 상선이 정박하던 암스텔강 하구의 매립지여서 토양에 물기와 모래가 많이 섞여 있었다. 건물은 해체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시당국은 이 건물의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샀다. 713개의 콘크리트 파일을 땅밑에 박아 기초를 보강한 다음 시민과 함게 살아숨쉬는 문화센터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베를라헤는 건물뿐만 아니라 BvB에 들여놓을 의자, 창문, 테이블, 전등, 카펫, 시계 등을 직접 디자인했다. 벽돌의 색깔까지 일일이 정했다.그야말로 총체예술작품이다. BvB는 유럽에서 문화재급 건물을 컨퍼런스홀로 개조한 문화공간들이 모인 협회 HCCE에 네덜란드에서는 유일한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공식 명칭: Beurs van Berlage Conert- & Congreszal

◆홈페이지: www.berlage.com/ www.beursvanberlage.nl

◆개관: 1903년 5월 27일(재개관 1992년)

◆객석수: Yakult Hall 534석, Amvest 홀 230석, Assay Hall 130석

◆건축가: Hendrik Petrus Berlage(1856∼1934). 1992년 Pieter Zaanen

◆부대시설: 컨퍼런스홀, 카페, 자전거 수리점

◆상주단체: 네덜란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Nederlands Philharmonisch Orkest, 네덜란드
체임버 오케스트라 Nederlands Kamerorkest

◆주소: Beurs van Berlage, Damrak 277, 1012 ZJ Amsterdam

◆전화: +31-20-530-41-41

◆교통: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도보로 5분, 담 광장에서 3분.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