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심 박영훈, ‘대어’ 구리 낚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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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중국 황이중 6단을 꺾고 먼저 결승에 오른 이세돌 9단. 불리한 초반을 딛고 대역전승으로 이끈 박영훈 9단(左)은 구리 9단(右)과 1-1 상황에서 오늘 최종국을 둔다.

정신을 바짝 차린 이세돌 9단은 확실히 강했다. 22일의 2국에선 초반부터 압도하며 2대0으로 결승에 선착했다. 중국의 황이중 6단은 1국에선 깜짝 놀랄 기량을 선보였지만 역전패의 아픔이 너무 컸던지 2국에선 힘없이 무너졌다.

박영훈 9단은 중국 최강자 구리 9단을 격파하고 1대1 타이스코어를 만들었다. 2국은 박영훈이 오전에 이미 너무 불리해져 ‘이세돌 대 구리’의 결승 대결이 확정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박영훈의 집념과 구리의 방심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대변화를 몰고 왔다. 294수 끝, 백 1집반 승. 마지막까지 반집 차로 뒤져있다가 극적으로 승리를 낚아낸 박영훈은 23일 결승 티켓을 놓고 구리와 최종전을 치른다.

삼성화재배 세계오픈 준결승을 치르기 위해 유성에 내려온 이세돌 9단은 그동안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팽이처럼 돌아가던 스케줄에서 벗어나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대국장인 삼성화재 유성연수원은 계룡산 자락에 외따로 떨어져 있어 산책과 휴식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곳. 이세돌 9단도 늦잠을 즐기고 손수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며 머리를 식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긴장을 너무 푼 것이 화근이었을까. 20일의 1국에서 이세돌은 황이중의 두터운 페이스에 말려들어 온종일 고생을 무진 했다. 다행히 종반전에 접어들어 황이중이 실착을 범하는 바람에 역전에 성공했지만(백 2집반 승) 다시 돌아보기도 싫은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이 고생이 약이 되었던지 2국은 초반부터 바짝 고삐를 조여 한 번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박영훈 9단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번 구리와의 대결 내내 자기 페이스를 찾지 못했다. 1국에선 초반부터 고전에 빠져 계속 힘들게 장고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190수 만에 돌을 던지고 말았다. 구리 9단은 중국이 이세돌에 필적할 유일한 인물로 꼽는 강자. 한국 프로들도 이런 평가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런 중압감이 박영훈의 정신력을 갉아먹었을까. 2국에서도 박영훈은 초반에 무너졌다. 실리를 선취한 구리를 박영훈이 공격했으나 구리는 한국 해설자들조차 찬탄해 마지않는 호착을 연발하며 순식간에 사정권에서 벗어났고 결국 승부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었다.

하나 박영훈은 구리의 방심이 빗어낸 바늘 끝만한 약점을 공략해 일순간에 승부를 혼돈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고, 이후 소신산(小神算)이란 별명에 걸맞은 눈부신 끝내기 추격전을 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집을 지는 바둑이었는데 혼백이 크게 흔들린 구리는 스스로 자멸하며 승리를 헌납했다. 구리는 ‘세계 최강의 아마추어’라 불린다. 기량은 뛰어나지만 가끔 이런 식의 겉잡을 수 없는 난조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이라면 23일의 최종전은 마음을 수습한 박영훈의 페이스로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삼성화재배 우승상금은 2억원. 지난 2년간 중국의 뤄시허 9단과 창하오 9단이 연속 우승하는 바람에 한국 바둑의 자존심은 크게 손상됐다. 하지만 23일 박영훈이 구리를 꺾으면 한국은 내년 1월의 결승전과 관계없이 우승을 확정짓게 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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