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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시기 … 민감한 사안 '말년 총장의 고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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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5일 대검찰청 자료실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 .이준(李儁) 열사.의 흉상 제막식에서 정상명 검찰총장이 흉상을 살펴보고 있다.[대검찰청 공보실 제공]

정상명(57) 검찰총장은 퇴임을 일주일여 앞둔 15일 오후 5시, 대검청사 본관 4층에서 열린 이준 열사 흉상제막식에 참석했다.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을 기념한 행사였다.

이준 열사는 189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배출한 우리나라 1호 검사다. 정 총장은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검사들에게 "이준 열사가 검사 생활을 한 기간은 무척 짧지만 정의로운 검사의 기개가 뭔지를 제대로 보여준 선배"라고 말했다. 이 열사가 당시 법부대신(현 법무부 장관)에 맞서 을사 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사람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파면된 일을 언급한 것이다.

그의 말은 BBK 주가조작 사건 수사와 삼성그룹의 비자금 의혹 수사를 염두에 둔 듯한 인상이 짙었다. 대검의 한 간부는 "주변의 어떤 오해와 질타, 어려움이 있더라도 검사가 정도로 가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정 총장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정 총장은 두 사건으로 역대 검찰총장 가운데 가장 바쁘고 복잡한 임기 말을 보내고 있다. 시기가 미묘하고 사안이 민감한 만큼 고민도 크다.

정 총장은 16일 대검 출입기자들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검찰총장에 취임하면서 스스로 금지령을 내렸던 폭탄주도 몇 잔 돌렸다.

정 총장은 검찰총장 2년을 포함, 총 30년 동안의 검사 생활에서 느낀 소회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무엇보다 그는 2007년 대선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BBK주가조작 사건' 수사와 관련된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검선(檢選.검찰의 선거)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 사건 수사 결과가 몰고 올 엄청난 영향력과 파괴력 때문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의 BBK 연루 의혹이 사실이라고 발표할 경우 파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도곡동 땅 수사 때처럼 어정쩡한 결론을 내놓으면 '정치 검찰'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홍준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은 18일 정 총장을 겨냥해 "도곡동 땅 사건 때처럼 이상야릇한 얘기를 한다면 검찰 전체가 (정치 검찰로) 오해받는 계기가 된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검찰의 중간수사 발표 날짜는 대선 후보 등록일인 25~26일 직전인 24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임채진 총장 후보자가 취임하자마자 김경준 수사 결과를 발표할 경우 부담이 적지 않다. 더욱이 임 내정자는 삼성그룹의 관리 대상이었다는 의혹마저 제기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 총장이 퇴임 전에 BBK 의혹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이에 대해 정 총장은 BBK 의혹 사건에 대해 검사로서 정도를 가겠다고 천명했다. "이번 사태는 아주 간단하다. 진실은 하나다. 그걸 향해 검찰은 나갈 것이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삼성그룹의 관리 대상 의혹이 제기된 검사들에 대한 수사 문제도 임기 말 정 총장에게 큰 고민이다. 그는 "30년 검사 생활을 하고 퇴직하는 마지막에 (검찰 간부들을 수사해야 하는) 특별수사.감찰본부장까지 임명하고 나가야 하느냐"고 개탄했다. 그는 검사장급 이상 여러 간부에게 의사를 타진한 끝에 박한철 울산지검장을 본부장으로 전격 투입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너도나도 고사하는 통에 낙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관리 대상 의혹 검사의 구체적 명단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하는 게 쉽지 않지만 적당히 넘어갈 수도 없다. 검찰 조직의 명예가 걸려 있다. 정 총장은 검찰 수사의 어려움을 스님의 참선에 비유하기도 했다. "(수사는)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구에게 유불리한지가 나오는데 그걸 의식하면 안 된다"고 했다. 또 "검찰은 가장 비인간적인 직업인 것 같다"며 "30년 검사로 지내면서 내가 살아온 삶이 참이었던가 생각해 본다"고 털어놓았다.

3일 뒤면 퇴임하는 정 총장은 "2년 임기를 마친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 땅 의혹 사건, 신정아 사건, 정윤재 사건이 연이어 터지더니 현직 국세청장까지 구속시키고 막판에 떡값 검사 명단이라는 것까지 나와 시끄럽다"며 "임기 마지막까지 레임덕이 오려야 올 틈이 없다"고 말했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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