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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고함(孤喊)] 코토 대가의 100년 전 고백 "조선 리듬은 파격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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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가야금산조는 1890년대 영암의 김창조(金昌祖)의 창안으로 시작된,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1시간 전후의 순수기악곡이다. 한국산조학회는 산조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국제활동을 벌이고 있다. 김창조.김죽파산조의 적통을 계승한 인간문화재 양승희와 무형문화재 고수 정화영.

지난 11일 요코하마노오악당(橫濱能樂堂)에서 매우 역사적인 무대의 막이 올랐다. 우리나라 가야금과 일본 코토(箏)음악이 각자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고, 동일한 곡을 서로 바꾸어 연주하기도 하고, 합주도 하는 매우 절제된 공연이었는데 그것이 권위 있는 노오악당 무대에 올려졌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20세기 최고의 '코토 명인' 미야기, 그리고 가야금 #12현 가야금과 그 영향을 받았다는 코토 #두 악기가 요코하마에 같이 울렸다

그 본무대는 메이지 8년(1875), 가가번(加賀藩)의 13대 번주인 마에다 나리야스(前田齊泰)가 도쿄 가미네기시(上根岸)의 저택에 지은 전형적인 노오무대였다. 이 무대는 나리야스가 죽고 난 후, 다이쇼 8년(1919), 다카마쓰(高松)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나가(松平賴壽)의 도쿄 소메이(染井) 저택으로 옮겨졌다. 그후 이 무대는 세칭 "노오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노오악사(能樂師)들의 활약이 줄을 이었으나, 결국 1965년에는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된 무대는 고스란히 보존되었는데 97년에 드디어 요코하마노오악당의 본무대로서 세간에 다시 등장케 된 것이다. 이 무대는 '타비'라고 부르는 특별한 버선을 신지 않으면 못 올라간다. 신들이 노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이번 무대는 노오무대였지만 공연된 것은 코토와 가야금이었다.

왼쪽부터 후카미 사토미, 나카시마 야스코, 오쿠다 우타노이치. 모두 이쿠타류의 명인이다. 140년 된 뒷면 경판(鏡板)에는 소나무와 백매가 같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 백매는 마에다(前田) 가문의 문양이다. 무대 꼭대기의 인(人)자형 와리즈카(割束)는 평양 근처 쌍영총벽화에 그대로 나타나는데 고구려 건축양식이다. [사진=임진권 기자]

코토 역시 일본의 악기로서 매우 오래된 것이다. 현재 쇼오소오인(正倉院)에 보존되어 있는 12현 신라금(新羅琴)을 한 원형으로 간주하듯이, 가야금의 영향을 받은 악기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가야금은 12현을 고수하고 있지만 코토는 13현으로 되어 있다. 비슷한 오동나무 울림통을 가지고 있지만 줄의 장력이 강해 줄을 받치는 상아 안족(雁足)이 높고 고정되어 있다. 나무로 되어 있으며 유동적인 가야금 안족과 대비된다. 그리고 오른손에 그들은 '쯔메'라는 가조각(假爪角)을 끼고 타는데 우리는 맨손으로 튕긴다. 우리는 명주실을 고수하고 있는데 그들은 테트론 합성섬유를 쓴다. 그러니까 코토는 모든 것이 강성이다. 그런데 비하면 우리 가야금은 모든 것이 자연이고 부드러우며, 특히 왼손의 농현(弄絃)의 깊이와 다양성이 자재로울 수 있도록 짜여 있는 것이다.

일본의 코토음악은 야쓰하시켄교(八橋檢校.1615~85)로부터 시작하여 교토 출신의 이쿠타켄교 기이치(生田檢校幾一.1656~1715)에 이르러 이쿠타류(生田流)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후에 에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야마다켄교 도요이치(山田檢校斗養一.1757~1817)가 야마다류(山田流)를 성립시키면서, 이쿠타류는 간사이(關西)의 제류(諸流)를 총칭하게 된다. 이쿠타류는 쯔메가 사각이며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야마다류는 쯔메가 둥글며 곡 중에 노래를 도입한다. 야마다켄교 자신이 노오의 소리꾼 출신이었다.

이날 두 유파에서 모두 인간문화재와 종가(宗家)의 대가들이 기량을 선보였다. 청중의 숨을 죽이게 한 탁월한 연주였다. 노오무대는 보통 "무서운 무대"라고 말하여진다. 일체의 장식이 없으며 연주자의 기량이 여여(如如)한 거울처럼 비친다.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서툰 사람은 서툰 대로, 달인은 달인의 경지 그대로 드러난다. 일체 확성기가 없다. 현대문명이 거부되고 있는 것이다. 전석 어디에서든지 소리는 똑같은 음량으로 들린다. 78세의 국보급 거장 나카시마 야스코(中島靖子) 할머니가 낮은 쪽문(切戶)을 통해 무대에 올라와 야쓰하시켄교의 '로쿠단노시라베(六段の調)'의 첫 음을 터뜨렸을 때 나는 노오무대의 깊이를 형량할 수 있었다. 나카시마의 연주는 농현의 미분음의 깊이를 코토에서도 잘 살려내고 있었다. 야쓰하시켄교가 죽었을 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태어났다.

내가 이날 새롭게 발견한 위대한 코토의 명인은 나카시마 할머니가 친히 배운 선생이었으며, '신일본음악운동'의 창시자이자 우리 조선음악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미야기 미치오(宮城道雄.1894~1956)였다. 과거 코토의 명인들은 모두 장님이었다. 미야기는 고베의 외국인 조계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200일 만에 악성 각막염을 앓고 8세에 완벽하게 실명한다. 그리고 바로 니다이 나카시마켄교(二代中島檢校)의 문하에 들어갔다. 여기 '켄교'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이것은 장님이 획득하는 최고의 관직을 가리킨다. 그런데 불과 3년3개월 만에 '멘쿄카이덴(免許皆傳)'이라는 독자적 일가를 이룰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한다. 모든 면허를 다 딴 것이다.

아버지 구니지로(國治郞)는 외국인 무역상회에 근무하던 사람이었는데, 생활이 여의치 않아 조선의 인천으로 터전을 옮긴다. 그런데 야쿠자들에게 상점을 습격당하고 상처를 크게 입는다. 미야기 미치오는 생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된 아버지를 돕기 위하여 조선에 올 수밖에 없었다. 1907년 9월 그는 인천에 왔다. 그리고 코토와 샤쿠하치(尺八)를 가르치면서 생업을 이어갔다. 곧 그는 유명해졌다. 일본인 제자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인천에 일본인들이 우글거렸다는 이야기다.

그의 성공담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길에 그를 인천의 요정 아사오카(淺岡)에 초청하여 그의 연주를 들은 사실로도 잘 입증된다. 미야기는 15세, 이토 앞에서 그의 처녀작 '물의 변태(水の變態)'를 연주했다. 이토는 깊은 감명을 받고 다음 귀국길에 반드시 그를 도쿄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곧 이토의 약속은 안중근의 총성과 더불어 사라졌다.

3부로 구성된 매우 파격적인 '물의 변태'는 안개.구름.비.눈.서리.이슬 등 물이 변하는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인데, 조선 산천의 이미지에서 그 파격적 악상과 리듬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가라기누타(唐砧)'는 바로 조선 여인들이 다듬잇돌을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에서 또다시 새로운 파격을 발견한 걸작이다. 코토와 샤미센(三味線)의 합주곡 4중주, 4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한강의 여유로운 물 흐름"에서 시작하여 점점 빨라지는데 '혼테(本手)'와 '가에테(替手)'라 불리는 선율의 복합적인 교체진행이 그 특징이다. 이 곡이 1919년 5월 16일 혼고(本鄕)의 중앙회당 작품발표회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 한 평론가는 "기괴한 서양음악 모조의 일.양합주"라고 혹평을 퍼부었다. 그 파격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의 천재성을 '서양흉내'로만 왜곡했지만, 그 파격의 본질을 나는 조선음악의 영향이라고 파악한다. 그는 길거리를 스치는 장사들의 고함소리로부터 조선의 정악, 속악, 민요, 그리고 산조까지 다 들었던 것이다. 젊은 그는 조선인들과 같이 먹고 놀면서 조선인들의 정감세계에 흠뻑 젖었다. 장님이니 차별의식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일본의 멜로디와 박자가 너무 단조롭게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조선의 미의식을 예찬한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조선의 풍광과 리듬을 소재로 작곡하여 일본 최고의 코토예술가가 된 미야기는 소개된 바 없다.

'가라기누타'는 백대웅이 편곡하여 이지혜가 연주했다. 그것을 들은 내 앞자리의 고상한 부인(保坂千惠子)은 이렇게 평했다: "오히려 미야기의 파격성이 너무 일본식으로 순화된 느낌." 그러나 황병기의 '침향무'가 이쿠타류의 명인 후카미 사토미(深海さとみ)의 손가락에서 울려퍼졌을 때, 그것은 정말 화사한 그녀의 이름대로 심해에서 울려퍼지는 낭랑한 침향의 천년 묵은 향기와도 같았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뭐니뭐니해도 양승희의 김창조.김죽파류의 가야금산조 독주였다. 양승희가 노오무대 위에 고수 정화영과 함께 조용히 착석했을 때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열정적인 기대의 박수를 보냈다. 초장부터 양승희는 유현한 진양의 리듬을 타고 여덟 번째의 지현을 깊게 눌렀다. 그때였다. "딱!"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줄은 홀애비줄이라서 딴 줄에서 옥타브 자리바꿈의 연주가 되지 않는다. 어찌할꼬? 양승희는 순간 너무도 태연하게 부들을 풀어 학슬의 명주실을 당겨 현침 아래 돌괘에 잡아매고 음정을 맞춘 다음 부들을 다시 감아 쪽지는 것처럼 예쁘게 묶어 순식간에 양쪽 현에 고정시켰다. 걱정이 태산 같았던 우리 연주팀은 새 가야금을 들여보냈지만 양승희는 사양했다. 위기일발의 스릴감이 감도는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면서 일본 청중들은 코토의 원류 가야금의 자연스러운 구조를 목도했던 것이다.

다시 "띵" 하고 첫 진양의 소리가 울려퍼졌을 때 내 앞의 한 여인은 주르륵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나는 코토와 가야금의 분별이 사라지는 절묘한 신비감을 느꼈다. 산조는 우리민족 예혼의 정화이자 곤륜에서 백두.후지로 뻗친 아시아대륙의 웅혼한 대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대선의 열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다시 산조를 잉태시킬 수 있는 이 나라의 혼백을 창조하는 일이 아닐는지!

◆노오와 코토='노오(能)'는 소리와 가면춤과 음악의 3요소로 이루어진 '일본적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데, 14세기 즈음 오늘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그 원형은 백제 음악으로까지 올라갈 것이다. '코토(箏)'는 나라(奈良)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원류가 가야금에 있다고 인정하는 일본인 학자도 많다. 에도(江戶)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많은 기악곡이 성립했다. 가야금과 같은 농현기법이 살아 있다.

도올 김용옥,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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