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순이는 정말 예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드라마를 보면서 오랜만에 가슴이 울컥해짐을 느꼈다. KBS2 새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전과자 출신 인순이(김현주)가 어릴 때 떠난 엄마(나영희)를 다시 만나는 장면이었다. 엄마가 뒤에서 “인순아!” 라고 부르는 순간, 인순이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에 대한 회한이 스친다. “어린 시절 모두가 돌아간 놀이터에서 그토록 불리고 싶어 했던 것, 수감번호 3xxx 대신 불리고 싶었던 그것, 그건 분명히 ‘인순아’였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아무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람이 돼 버리기까지 인순이는 누구나 당연히 누리는 엄마의 애정에 허기졌고 살인 전과자라는 낙인 아래 허우적거렸다. 그 결핍과 부정의 아픈 시간을 엄마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서 떠올리는 모습은 근래 드라마 중 손에 꼽을 만한 뛰어난 장면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소중하게 불리고 싶다. 인순이가 “인순아!”라고 불렸을 때, 그는 비로소 엄마에게 큰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개인이며, 세상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다 자라고 난 뒤 나는 원망했다. 내가 다닌 학교와 부모님은 왜 “내가 소중하다”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그걸 정말 몰랐느냐고 물어본다면 난 정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규칙에 잘 순응하며 사회와 국가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을 최선의 가치로 가르쳤던 학교, 늘 ‘조신한 여자’가 되지 못한다며 나무랐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무럭무럭 키워왔다. 마음속은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그런데 세상을 살아보니 긍정적인 자아를 가지는 것만큼 중요한 행복의 열쇠는 없었다. 그저 모두가 그랬던 시대 탓이려니 하고 넘기지만 마음속에 박힌 자기 부정의 뿌리를 뽑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보다 100배는 더한 절망에 빠지는 게 당연해 보이는 초라한 인순이가 되새기는 “인순이는 예쁘다”라는 혼잣말이 새삼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인순이 역시 안다. 살인 전과자라는 거대한 주홍글씨를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자신이 “저주받았으며 바보, 쓰레기”인걸. 늘 자신이 “왜 태어났을까” 궁금해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내 곁에 있으면 다쳐. 난 재수없는 애야”라고 경계를 해야 하는걸.

하지만 어차피 살아가야 할 인생이라면 인순이는 또 “ 괜찮아 난 착해, 난 예뻐, 난 사랑스러워, 난 특별해”라며 자신을 다독인다.

진짜로 나를 울게 만든 건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인순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부정적인 가르침의 부모와 교육체제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저렇게 말해본 적이 있었던가. ‘인순이는 예쁘다’라는 제목은 예쁜 인순이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 예쁘지 않은 인순이가 세상을 버티는 힘을 만들어 내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 긍정의 에너지에 나를 비롯한 ‘셀프 이스팀(Self-Esteem) 결핍 증후군’에 시달리는 초라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독일 힘을 얻을 것 같았다.

‘인순이는 예쁘다’는 젊은 여자 주인공이 자아와 사랑과 성공을 찾아가는 길을 내세운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을 갖췄다. ‘내 사랑 삼순이’의 ‘살인 전과자’ 버전이라 할 이 드라마는 세상에서 주변으로 밀려나 눈에 잘 띄지 않는 보잘것없는 인생이, 그럼에도 가슴속에 품고 있어야 할 따뜻한 희망을 보여주는 차이점이 있다. 그 온기가 고맙고 소중해 보인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