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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항일 추모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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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픈강 인근엔 한말의 독립투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서 있다. 또 크라스키노엔 안중근 의사의 단지(斷指)동맹 결성을 기념하는 단지동맹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이범진 공사 추모비가 있다. 이외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엔 신한촌의 항일독립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이들 기념비 및 추모시설들은 모두 한국이 소련과 국교를 수립한 1990년 이후 우리 정부와 일부 지식인들, 국민의 끈질긴 노력과 염원에 의해 건립된 것들이다.

당시 이들의 유적과 유물, 역사적 기록들을 찾기 위해 국교 수립 이전부터 음지(陰地)에서 소련 국립고문서박물관을 비롯한 각종 시설들을 뒤져 자료를 찾아낸 숨은 애국자들이 있었다. 또 추모비 건립이 진척을 보지 못하자 사비(私費)를 들여 한국에서 뜻맞는 사람들끼리 옛 독립군의 활동지로 가 조용히 위령제와 굿판, 제사를 지낸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러시아 내에서도 민족주의적 기운과 북한을 의식한 세력들, 일본.중국 등 주변국을 의식한 사람들의 반대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총체적 노력으로 러시아 정부와 지식인들, 그리고 국민은 대승적 차원에서 이들의 유혼을 달래는 추모비의 건립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고 추모비 부지 등을 무상으로 기부해주었다.

그 결과 조국이 광복된 후에도 냉전으로 인해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고 아무도 추모하거나 찾아주지 않던 우리 선조 독립군들과 그 가족들의 원혼을 달래고, 우리 민족정기를 복원하자는 조그마한 추모비들이 속속 건립될 수 있었다.

10일 인천 앞바다에서는 한.러 합동군사교류 행사차 한국에 온 러시아태평양함대 소속 '바략'호 등이 1백년 전 러.일전쟁 때 희생당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헌화식을 거행했다. 또 일부는 수몰된 지 1백주년을 맞아서야 건립하게 된 희생자 추모비 제막식에도 참석해 눈물을 흘렸다.

한국과 러시아 모두, 교과서 속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추앙하면서도 직접 찾아가지 못했던 현장들을 거의 1백년 만에 상호 방문하고 조그마한 추념비라도 세워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이 사건들은 동북아에서도 냉전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돼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