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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다꾸와 다꾸의 친구들이 가세하자 전세는 일시에 판가름이 나버렸다.수적인 면에서도 그랬지만 다꾸의 친구들이 그야말로 전문가였기 때문이었다.도끼가 진짜 도끼를 들고 설쳐댔지만 공격이기 보다는 방어하는 자세에 지나지 않았다.구경꾼들이 몰려서고 어디선가 백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자 찢어져.』 누군가 소리쳤는데 도끼네나 우리나 순식간에 일제히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선수들은 미리 약속한대로 이대입구의 제과점에 집결했다.
네 명이 코피가 터지거나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한 명이 허벅지를 포크로 찔렸다고 했지만 병원에 가야할 정도는 아니었다.밖으로 나와서 걷는데 너댓명이 다리를 절고 있었지만 우리는 승리에취해서 아픈 것도 몰랐다.나는 이마가 벽에 긁히고 어깨 한쪽에통증이 느껴졌지만 엄살을 떨지는 않았다.
우리 선수들이 모두 화양리로 몰려가서 서로 무용담을 떠벌리며놀다가 헤어진 건 밤 열한시가 넘어서였다.술을 한잔씩 하고 나니까 악동들이 공중전화에 가서 계집애네 집에 전화들도 하고 그랬다.우리는 무언가 큰 일을 해낸 놈들처럼 조금 씩 들떠있었던거였다. 집에 가니까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셨다. 『아니 넌 정말…옷이 이게 뭐야.이마는 까지고…너 술 마셨니.』 어머니는 술 이야기를 하실 때에 목소리를 낮춰주셨다.아버지가 들으면 집안이 시끄러워진다는 걸 모르실 리가 없었다.내가 어머니의 뺨에 입을 쪽 맞추고는 환하게 웃었더니 어머니도 걱정이 가시는지 내게 한번 눈을 흘기고는 안방으로 들어 가셨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벌써 소문이 쫘악 퍼져 있었다.우리가열네통 아치들을 신촌역 앞에서 박살냈다는 이야기들이었다.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운동장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건영이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들었니.한놈이 완전히 뻗어서 병원으로 실려 갔대.』 건영이말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제대로 한방 먹였나보지.』 『통수라는 놈을 내가 던져버리기는 했는데….』 그제서야 나는 건영이가 무얼 염려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성식이 문제가 있는데 그놈들 입장에서 따지고 들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야.』 그러고 있는데 백차가 교문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였다.경찰복과사복 하나가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걸 보고 있던 건영이의표정이 굳어지는게 완연했다.무언가 심상치 않았다.도깨비가 운동장으로 뛰어나 와 건영이와 내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하여간 이 녀석들… 다른 녀석들은 다 어디 갔니.』 악동 넷과 동우와 건영이,이렇게 여섯명은 교무실로 불려갔다가 수업개시를 알리는 종이 친 다음에 백차에 실렸다.아이들이 교실 창문마다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백차에 오르자 사복이 우리 여섯명 모두에게 수갑을 채웠다.나는 그제서야,교무실을 나서면서 선생님들끼리 누군가가 죽었다고 속삭이던 게 성식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건영이는 푹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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