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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94.청산1호 전경환 함정에빠진 비밀출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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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통령兄의 각별한 애정으로 가장 과분한 권력을 누렸던 것으로인식돼온 동생 전경환(全敬煥)씨는 兄이 권력을 놓자 거꾸로 첫번째 청산대상인물이 됐다.全씨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88년봄에 있었던 몇 장면의 스케치가 필요하다.
첫번째 장면.
88년 3월 18일 오전 11시쯤 청와대에서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내려오는 길목 오른쪽 全전새마을중앙회장의 2층 양옥집.맞은편 언덕쪽에 위치한 安家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잠깐만 뵙고 싶습니다.잠깐 이쪽으로 오실수 있겠습니까.』 전화는 全씨에게 안가로 올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全씨는집을 나서기가 곤란했다.이미 새마을관계 비리가 봇물 터지듯 연일 신문에 보도되면서 기자들의 집요한 시선이 그의 집 주위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갔다가는 기자들이 따라 붙을지도 모릅니다.대신 내가믿을만한 사람을 하나 보낼테니 나한테 할 얘기를 해주시오.』 全씨는 자신이「金사장」이라고 부르는 측근을 대신 보냈다.잠시후그가 가져온 메시지는『잠깐 나가 계시면 모든 일을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내용이었다.全씨는 바로 일본 오사카行 비행기편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가장 빠른 비행기편이 오후 6시30분.일단「김동길」이라는 가명으로 1등석을 예약했다.
이상이 全씨의 측근 X씨가 전하는 그의 출국배경설명이다.全씨는 기자의 직접취재를 피하면서 측근 X씨를 내세워 이같이 주장했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대목은 全씨의 출국을 권유한 전화의주인공이다.全씨는 최근 측근 X씨에게『안기부에 근무했던 K씨』라고 밝혔다.K씨는 당시 박철언(朴哲彦)청와대정책보좌관의 측근으로 통했기에 그의 전언을 여권핵심의 뜻으로 받아들였 다는 얘기다. 이에대해 당사자 K씨는『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박철언前의원 역시『누구에게 그런 일을 시킨 적도 없고,또 그런 보고를 받은 일도 없다』고 부인했다.朴전의원은 나아가『당시나는「5,6공은 같은 뿌리」라는 생각에서 全전대통령 주변사람들의 구속에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장면.
그날 저녁 김포공항.全씨는 발권마감시간 직전인 오후 5시56분쯤 다른 사람을 시켜 예약자 이름을 본명「전경환」으로 바꿔 티켓을 구입했다.全씨 자신은 오후 6시5분쯤 2명의 수행원과 함께 공항청사에 나타났다.그는 잠시 공항의 한 사 무실에 들렀다가 15분쯤 다른 승객들에 앞서 비행기에 탑승했다.출국수속은공항관계자들이 대신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명까지 동원한 全씨의 비밀출국현장을 某 조간신문사의 공항출입기자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그 기자는 全씨가 본명으로 발권수속을 끝낸직후 공항관계자로부터 이 사실을 제보받았다.그는 이를 곧바로 본사에 알린뒤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위해 출국장으로 나와 全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당시 그기자는 안기부 간부와 나란히 全씨의 출국을 지켜보았으며,안기부요원조차『도망간다는 오해를 받을텐데 왜 갑자기 출국하는거지』라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당연히 全씨의 비밀출국 사실은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됐다.물론 그의 출국은「해외도피」로 해석됐다.
세번째 장면.
다음날인 19일 아침 서울 서대문구 연희2동 全전대통령의 사저.안무혁(安武赫.현 민자당 의원)안기부장은 마침 다른 보고가있어 이날 아침 연희동을 찾았다가 입구에서 안현태(安賢泰)前경호실장의 다급한 표정과 마주쳤다.安전경호실장은 全전대통령이 몹시 화가 나 있음을 알렸다.
安안기부장이『왜 그러느냐』하고 물었다.육사 3년 후배인 安전경호실장이『전경환회장이 각하께 보고도 안하고 어제 일본으로 출국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아침 신문도 보지않고 연희동으로 달려온 安부장은『정말이야』라며 놀랐다.
全대통령은 安부장을 보자마자『무슨 변호사인가 하는 친구가 잘못 얘기한 것만 듣고 나갔다는데 당장 찾아서 데려와』라고 명령했다.全대통령이「변호사」운운 하는 얘기를 한 것은 全씨가 출국직전 자신과 절친한 대구출신 법조인에게 자신의 출 국에 따른 법적인 영향문제를 자문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安부장은 당장 안기부로 돌아와『전경환을 찾아라』고 지시하고는안기부 고위간부인 국장 1명을 팀장으로 일본에 급파했다.全씨가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잠적해 그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안기부는 全씨의 평소 인맥을 전부 들쑤신 끝에 그를 찾을수 있었다.그런데 全씨는 안기부 간부의 설득에도 막무가내로 귀국을 거부했다.安부장이 직접 통화,全전대통령의 진노사실을 전하는등 장시간 설득에 나서야했다.
여기서 의아한 대목은 安안기부장이 全씨의 출국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공항출국장에 안기부요원이 있었는데 왜 안기부장이 全씨의 출국사실을 다음날 아침까지 몰랐던가.
安의원은『그럴수 있다』고 말한다.통상 안기부에서 파견된 공항담당요원은 본부의 과장급도 직접 전화등으로 지휘할수 있는 정도이기에 부장은 보고를 받지않을 경우 모르고 지나갈수 있다는 것이다. 네번째 장면.
全씨가 46시간만에 귀국한 다음날인 21일 오전11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서울을 피해 김해공항으로 입국한뒤 보도진을 피하기위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全씨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보이자 보도진들이 일제히 에워쌌다.그러나 全씨 는 보도진의 질문에 답하지않고 새마을본부 간부들이 모여있는 본관 4층 회장실로 향했다.
간부들은 모두 침울한 표정들이었다.보도진이 회의실까지 에워쌌다.경황중에 그의 측근 金모씨가 다가가『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항의조로 물었다(새마을본부 간부들은 全씨가 출국하자마자 내무부지시로 일괄사표를 제출해야만 했다).이때 全씨는『내가당했다.나가 있으면 전부 해결한다고 해놓고서는…』이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全씨는『더이상 얘기를 안들어도 다 알겠더라』라고함정 가능성을 확신했다고 한다.물론 全씨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지않았으며 대신『국 민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의말만 했다.
이상의 장면들을 엮으면 하나의 줄거리가 만들어진다.간단히 말해 全씨는 새마을 비리문제로 한창 시끄러운 가운데 조기진화방법으로 일시적 외유를 권하는 정부관계자의 얘기를 듣고 몰래 출국했다가 비밀출국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해외도피 」라는 국민적 비난을 받게되고,결국 구속.수감이라는 화를 자초했다는 얘기다.그래서 全씨는 물론 5공측 인사들은 모두「함정에 빠졌다」고주장한다.물론 이는 피해자측의 주장이다.6공측 관계자들은 『어차피 새마을비리문제가 심각했기에 全씨 의 처벌은 불가피했다.갑작스런 출국은 다만 그의 사법처리시기를 앞당겼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당시 여권 핵심관계자 Q씨의 기억은 함정의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Q씨는 『3월초 언론에 새마을비리문제가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을 무렵입니다.6공의 핵심인물들이 대책회의를열었죠.당시 6공내에서도 5공쪽과 가까운 사람들은「빨리 사건을덮어야 한다.일단 덮어놓고 선거를 치러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6공 핵심 참석자들은 「곪은 것이 터졌다.고름을 짜내고 일단락을 지어야한다.덮어놓고 선거를 치르려하다가는 더 곤란한 상황을초래한다」고 주장했죠.결과론적으로 고름 을 짜낸 셈이죠』라고 말했다. ***6共핵심 대책회의 Q씨의 기억에서 보여지듯 당시여권의 최대관심사는 눈앞에 닥친 총선이었다.따라서 갓 출범한 정권의 미래가 걸린 총선승리를 위해 「고름을 짜내는」결단이 내려졌을 가능성은 높다.
全전대통령은 새마을비리보도가 한창이던 3월14일 청와대출입기자들을 연희동집으로 불러『섭섭하다.내가 큰 일을 해놓고 나간 이상 좀 작은 잘못을 내 가족들이 했다해도 좀 덮어주는 것이 사람끼리의 신의가 아닌가』라며 언론보도에 불편한 심기를 표시했다.6공측에 대해서도『자꾸 밀리다가는 내무부장관을 지낸 盧대통령도 문제가 될수 있다』고 경고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도『전경환을 구속하지 않고는 총선을 치를수 없다』는 6공측의「총선승리용」희생불가피성 주장에 동생 의 구속을 양해하지 않을수 없었다.어차피 그도 6공이라는 배를 함께 타고 있었기에 안전운항에 명운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6공측은 메신저 이원조(李源祚)전의원과 홍성철(洪性澈)비서실장등을 보내 全전대통령으로부터 동생의 수사.구속을 사전에 양해받는 과정에서『총선만 끝나면 곧 석방될수 있으리라』는 약속과 함께『5공 문제도 全씨 구속으로 일단락짓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러나 약속은 이행될수 없었다.총선에서 예상외로 완패,여소야대가 되었기 때문이다.적어도 5공 청산문제와 관련한한 당시 여론은 같은 뿌리인 5,6공간의 담합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전경환씨는 풀려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구속은 5공청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됐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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