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유전자 타입' 맞춤치료 열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몇 년 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아온 K씨(38). 질병에 대한 이해도 높고, 의사의 치료지침을 잘 따라 모범환자로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성실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우울증 치료는 생각보다 큰 진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이 자주 재발해 주위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담당 의사는 최근 그의 혈액을 뽑아 유전형 타입을 분석했다. 결과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인 전달체 관련 유전자 타입이 다른 환자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의사는 K씨에게 다른 약을 처방하고,정신지지 요법을 추가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정신약물유전체학'의 임상 실례다.정신약물 유전체학은 우울증 등 많은 정신과 질환이 '마음의 병'이라기보다 뇌의 생화학 또는 신경생리.신경내분비 등 물질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대뇌 전두엽(前頭葉)의 혈류 및 대사의 감소를 보이고, 노르에피네프린이나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수용체 변화가 관련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이를 방증한다.

특히 이러한 뇌의 물질 변화에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같은 정신질환도 여러가지 타입으로 나눠 치료하는 연구들이 시도되고 있다. 이른바 정신질환 분야에 '맞춤 치료'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 치료제 클로자핀을 투여하면 증상이 호전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전혀 약물반응이 없는 환자가 있다. 이러한 약물반응의 차이를 유전자 타입으로 분류해 개인에게 치료효과가 높은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다.

1998년 미국 국립보건원은 산하 6개 연구소에 약물유전체 연구를 위한 네트워크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해 2천만달러를 투입했고, 이 예산을 매년 40%씩 증액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선 고려대 의대 이민수 교수가 이끌고 있는 '정신작용 약물유전체 연구센터'가 보건복지부의 과제를 받아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9년 동안 시행되는 이 연구의 1단계 작업은 정신에 작용하는 약물 반응 유전자 및 다형성(多形性)발굴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환자에게 실제 적용할 수 있는 임상지침서를 만들고 신약 개발의 표적 유전자를 찾는 것이 2, 3단계의 목표다.

李교수팀은 최근 우울증과 관련된 몇 가지 유전자 타입을 찾아냈다. 대표적인 것이 대립유전자의 길고(Long) 짧은(Short) 형태에 따라 L/L.S/S.L/S 등 세 가지 타입으로 나누는 것. 이 중 긴 대립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환자가 짧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환자보다 항우울제의 반응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완전히 뇌속의 물질 변화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예컨대 재산 손실, 시험의 실패, 스트레스 등이 원인이 돼 나타나는 우울증은 정신 또는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이에 대해 李교수는 "충격에 취약한 뇌구조를 가진 사람에게 환경적 요인이 방아쇠 역할을 함으로써 우울증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결국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에 따라 심리적 반응이 다른 것은 뇌의 유전적인 결함과 생화학적인 차이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우울증의 경우 자신에게 불리한 환경이 바뀌지 않더라도 뇌의 변화를 유도하면 질병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를 한다는 것이다.

李교수는 "약물유전체 연구가 결실을 보게 되면 치료 초기부터 미리 환자의 약물반응을 예측해 최선의 치료 전략을 짤 수 있다"며 정신질환 치료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고종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