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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헬기추락사 왕태기 소령 조종간 놓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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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자세를 낮춰라. 불시착에 대비하라."

5일 발생한 육군 헬기 추락 사고 때 숨진 고 왕태기(39.사진) 소령이 승무원과 탑승 장병에게 내린 지시이자 마지막 유언이다. 왕 소령은 추락 헬기의 부조종사였다.

이날 오후 7시18분. 호국훈련에 참가한 항공작전사령부 소속 헬기 5대는 공중강습 작전 훈련을 위해 2사단 장병들을 태우고 강원도 인제군 현리의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러나 이륙 직후 왕 소령이 탑승한 4번기에 "쾅"하는 굉음과 함께 강한 진동이 발생했다. 왕 소령 헬기의 꼬리 부분이 바로 뒤에서 이륙한 5번 헬기의 주날개와 부딪쳐 잘려나간 것이다. 꼬리가 잘린 4번기 동체는 중심을 잡을 수 없어 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부조종사였던 왕 소령은 조종사 이명환(31) 준위에게 "위급 상황이니 조종을 내가 맡겠다"고 외쳤다.

사력을 다해 조종간을 잡은 그는 즉시 동승한 두 명의 승무원에게 헬멧에 장착된 헤드셋을 통해 "자세를 낮춰라. 불시착에 대비하라"고 소리쳤다. 동승했던 승무원 안기복(22) 상병은 "왕 소령의 지시에 따라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이 침착함을 되찾았다"고 기억했다.

왕 소령이 조종간을 잡자 UH-60(블랙호크) 헬기는 1분여 요동치다 폭 50m의 활주로 오른쪽 끝부분으로 곤두박질쳤다. 4호기에는 왕 소령 외에 16명의 승무원과 훈련 장병이 타고 있었다. 활주로 좌측에는 200여 명의 장병이 대기 중이었다.

왕 소령이 조종간을 지키지 않았다면 대규모 인명피해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함께 조종을 맡았던 이 준위는 "왕 소령이 앉았던 동체 좌측이 먼저 지면과 충돌해 왕 소령만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날 다른 헬기의 조종을 맡았던 동료 서춘도 소령은 "왕 소령은 평소 과묵하지만 병사들과 텐트 치는 작업을 같이할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성격이었다"며 "마지막까지 부하들의 목숨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왕 소령의 영결식은 7일 오전 9시 성남 분당 국군수도병원에서 항작사 부대장으로 열린다. 육군은 왕 소령에게 1계급을 추서하는 한편 정부에 훈장 수여를 건의하기로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희숙(38)씨와 11살, 9살의 두 아들이 있다.

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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