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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명분'… 결국 후손에 재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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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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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의 이화령터널(경북 문경~충북 괴산)은 844억원이 투입된 국내 1호 민자도로다. 1998년 건립 당시 예상 교통량은 하루 2만4000대. 하지만 2004년 바로 옆에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하루 2000여 대(예상치의 9%)만 오가는 유령터널이 돼 버렸다. 손해를 본 ㈜새재개발은 4년간의 소송 끝에 법원에서 강제조정을 끌어냈다. 건설교통부가 터널을 인수해 국유화하되 625억원을 지급하라는 결정이다.

이화령터널은 '민자 유치→최소수익 보장→국고로 적자 보전→결국 국유화'의 경로를 밟은 대표적 사례다. 숱한 민자도로들이 건설업체엔 '황금알을 낳는 거위', 국민에겐 '혈세를 먹는 하마'로 둔갑한 지 오래다. 하지만 건교부는 2014년까지 수도권에만 10개의 고속국도를 민자도로로 건설할 예정이다.

세금이 곳곳에서 줄줄 새면서 국가재정이 몸살을 앓고 있다. 지방 균형개발.사회 양극화 해소.고령화 대책이라는 근사한 명분으로 포장돼 있어 예산 지출을 차단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이 때문에 재정개혁이 다음 정부가 풀어야 할 최대 과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외국어대 최광 교수는 "복지 지출 증가와 고령화.저출산 추세를 감안하면 사실상 다음 정부가 재정개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구멍 뚫린 재정=기초노령연금제는 국민연금 개혁안과 패키지로 출발했다. 국민연금을 깎는 대신 저소득층 노인은 기초노령연금으로 지원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올봄 여야가 국민연금 개혁은 표 떨어진다며 서로 미루다 백지화시켰다. 기초노령연금제만 덜컥 통과시킨 것이다. 기초노령연금에 들어갈 예산은 내년에 2조2000억원→2009년 3조4000억원→2015년 5조9000억원→2028년엔 37조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또 내년부터 저소득층 근로자가 일을 하면 본인이 받는 임금 외에 정부가 최고 80만원을 얹어 주는 근로장려세제(EITC)가 도입된다. 2010년까진 매년 1500억원이 들어가지만 2014년부터 연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이 필요한 사업이다.

이 제도는 일용직이나 노점상 등은 소득 파악이 어려워 현실적으로 '얌체 신청자'를 가려내기 쉽지 않다는 맹점을 안고 출발한다. 여기에다 내년에는 남북경제협력도 본격화한다. 한국경제연구원 조경엽 연구원은 "복지제도는 일단 도입하면 되돌리기 어려워 도입 단계부터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며 "정부와 정치권의 생색내기가 후세대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수표된 재정개혁=노무현 정부도 예산 씀씀이를 통제하기 위해 2004년부터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세워 왔다. 향후 5년 동안 수입과 지출을 미리 제시해 정부 살림살이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을 막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말 그대로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다. 2004년 내놓은 계획에 따르면 2008년 관리대상수지는 균형을 이뤄야 한다. 하지만 8월에 발표된 2008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관리대상수지는 11조원 적자를 보게 짜여 있다.

정부의 방만한 씀씀이를 조장해 온 특별회계.기금 정비도 '구두선'에 그쳤다. 2005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는 특별회계.기금 정비 방안을 내놨다. 당시 57개인 기금은 50개로 줄이고, 특별회계도 19개에서 11개로 통폐합한다는 것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금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세 개가 늘었다. 특별회계는 18개(2008년 기준)로 한 개 줄인 게 고작이다.

◆재정개혁 마지막 기회=다음 정부 임기가 끝나는 2012년까지는 65세 노령인구 비중이 12%에 그친다. 국민연금을 타갈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면 국민연금 수술을 비롯한 재정개혁은 영영 물 건너갈 것이란 지적이 많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선빈 수석연구원은 "미국도 연금개혁을 하려 했으나 65세 이상 노인의 88%가 연금을 타게 되자 결국 개혁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아예 정부 씀씀이에 상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연세대 김정식 교수는 "정부에 예산을 맡겨 둬선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지출을 늘리게 마련"이라며 "일부 유럽 국가처럼 아예 지출 상한선을 두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은 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가 3%를 넘는 회원국을 제재하는 장치를 도입했다.

◆특별취재팀=정경민 차장, 박혜민.윤창희.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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