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회화록』 - 3000여쪽에 당대의 쟁점 촘촘히 밝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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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07면

회고록은 주관적 진술에 기대어 살아온 시대를 되짚는다. 자서·고백·추억담 등 숱한 자전적 기록이 여기에 속한다.
대화록은 대개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응하는 과정을 통해 가치를 재조직화해 이내 문자화한다. 항간의 대화록은 물론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대화』, 대다수 경전이나 『논어』의 상당 부분도 언행록으로 대화체가 필수인 셈이다.

『백낙청 회화록』(이하『회화록』)을 근거로 삼자면 ‘회화’는, 마주 보는 대화, 정담(鼎談), 다중좌담까지 제한이 없되,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다. 삶을 회고조로 읊거나 자취를 뒤쫓거나 하는 것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주관적 관점이 배제되고 담화 현장에서 바로 담론 내용과 수준이 검증된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넘어 사뭇 냉기가 돈다고나 할까. 담화 내용은 당연히 당대의 쟁점을 골간으로 한다.

사실 어쭙잖은 담화는 한 시기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주제를 다루는 언어가 시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도 있다. 다시 읽어도 새로운 맛을 주는 ‘회화’가 되려면, 그러므로 반드시 남다르게 탁월한 안목으로 시대와 진리의 중심을 관통해야만 한다. 이때 회화는 그저 과거의 담화가 아니라 현재성을 지니게 된다. 요컨대 『회화록』 출간으로 한국 사회는 담화사적 측면에서 ‘회화’라는 새 양식을 성취한 셈이다.

『회화록』은 여느 회고나 대화록에 비길 수 없이 방대한 양이다. 인물의 수나 다양함 등 서지학적 측면에서도 유례가 없다. 5권으로 묶은 『회화록』은 3000여 쪽에 책 무게만 해도 5.1㎏이다. 토론과 생각의 두께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회화 기간 40년, 편집 1년, 교정교열 6개월, 청사 선생이 원고를 바로잡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 회화 상대로 등장하고 있는 133명에게 빠짐없이 연락을 했는데 당시에는 논쟁적 관계에 있던 이들까지 게재를 마다한 경우 없이, 기꺼이 반색했다.

『회화록』은 2000질을 찍어 벌써 반 이상이 출고되는 보기 드문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읽은 이들이 입 모아 말하는 소감은 “정작 읽어보면 잘 읽혀요. 논문하고는 달라서”다. 눈이 뻑뻑할 것만 같은 담론도 생기 있게 구어체화되면 맛 좋은 지적 식량이 되는 게 분명하다.

책은 1권부터 읽는 게 자연스럽지만 『회화록』은 5권 끝에 붙어 있는 15쪽에 이르는 연보를 먼저 뜯어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연대기는 어느 순간 약전(略傳)을 읽는 매력으로 다가오면서 시대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시적 시계(視界)를 갖게 한다. 이처럼 상세한 백낙청 연보가 여태 없었다는 점에서도 솔깃하다.

청사 선생답지 않은 오기(誤記)가 한 군데 나오고 있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별미’다.

“딸을 시집보낸 게 1995년인데 93년으로 써서 집사람에게 타박을 들었어요.”
연보로 처음 드러난 이야기도 있다. 문화와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일찌감치 고전이 된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고대·중세편』을 번역해서 펴낸 1976년 연보 말미에 사촌형 백낙신에 이어 박윤배·김우중이란 이름이 나온다. 두 벗은 탄압 등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던 70년대 창비를 도왔다.

유신체제가 결빙점에 있던 때인지라 바깥으로 알려졌더라면 양쪽이 다 신간 편치는 못했을 터다. 청사와 고교 입학동기인 두 사람은 2학년 때 집을 나가 학교를 한 해 쉬었다. 이윽고 한 사람은 광산업을, 한 사람은 대기업(대우그룹)을 이끌었다. 가출 도반으로 평생지기가 된 둘은 백낙청과 창비를 숨어서 지원하면서 가슴 졸였다. 인연을 이어 김우중은 90년대에 민족문학작가회의를 후원하기도 했다.

한국지성사의 뒤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즐거움도 『회화록』이 건네주는 쏠쏠한 껴묻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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