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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연애편지 쓰는 환상소년 이명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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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08면

아직 개봉 초기지만 ‘M’은 ‘대박’ 행진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개봉 첫 주말 관객 수가 23만 명이다(100억원대 대작 ‘형사’로 흥행 실패를 맛봤던 감독은 이번엔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 30억원 미만의 알뜰한 영화. 그래도 손익분기점은 130만∼150만 명이다). 평단이나 언론의 반응도 엇갈린다. 혹평은 예의를 모르는 것이 특징이다. 한 네티즌은 “영화 초반부 뭔가 있어 보였는데 결국은 허세다. 드라마타이즈된 뮤직비디오를 두 시간으로 늘린 것”이라고 공격했다. “감독은 내레이션의 부재를 얘기하지만 이야기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뻔한 게 문제”라는 평은 그나마 점잖다. “‘M’은 마스터베이션의 M”이라는 혹평까지 나왔다.

물론 그는 좌절을 모른다. 오랜 세월 악평에 길들여진 탓이란다. 1988년 데뷔작 ‘개그맨’ 때 이미 “대한민국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들었던 그다. 평단과 시장을 동시에 만족시킨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전까지 그의 영화에는 늘 ‘유치하다, 주제 없다, 만화 같다’는 딱지들이 따라다녔다. 그의 스승이자 지지자인 송혜숙 전 서울예대 교수는 “영화적이고 독창적인 이명세 영화가 저평가되는 데에는,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좌파영화ㆍ테제영화의 강한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이명세 감독이 촬영장에서 사용하는 디렉터스 체어. 영화 ‘M’ 때도 여기에 앉았다.

반면 이명세 영화의 지지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이명세 월드에 대한 매혹을 애정고백 하듯 털어놓는다. 이명세 영화가 무슨 주술적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명세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감독”(평론가 이동진),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영화, 20년 후 감독으로서 내 역할모델”(감독 이해영)이라는 찬사를 내놓는다. 실제로 그는 국내 감독으로는 드물게도 팬클럽(‘형사중독’)을 이끌고 있다. 그것도 반대자들이 주저 없이 최악의 영화로 꼽는 ‘형사’ 때 결성됐다. ‘형사중독’ 출신으로 ‘M’ 스태프가 된 이도 여럿이다.

열광 아니면 혹평. 어느덧 이명세 영화는 취향을 나누는 기준이 돼버린 듯한 느낌이다. 아니 어찌 보면 세상과 태도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 ‘이명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다른 말로 “내면에서 뭔가 만들어 애지중지하는 사람들과 그런 부질없는 짓은 허황되고 옳지 못하다는 사람들”로 말이다(네티즌 ‘가끔영화’).

‘이명세 영화’라는 고유명사
자타 공인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는 자기 영화를 찍는 거의 유일한, 최후의 감독이다. “영화란 스토리가 아니고 이미지의 예술이며, 영화를 통해 관객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건 결단코 스토리 때문만이 아니”라고 믿는 감독이다. 또 “영화란 찰나의 예술이며, 오감을 일깨워주는 것”이라며 일순간의 비주얼·사운드·리듬감·색감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너무도 정교하게 짜여 있어서 살아있는 유기체라기보다는 인공적 조형물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심지어 배우를 도구화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우를 인격체로 대접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의 모든 것, 이미지ㆍ외모ㆍ그를 둘러싼 풍문까지도 영화적 수단ㆍ언어로 삼는 것이다. 대사도 좋은 음질을 위해 무조건 100% 후시녹음이다. 내겐 프리 프로덕션ㆍ포스트 프로덕션이 따로 없다. 모든 것이 프로덕션, 영화 언어다. 거기서 스토리는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M’은 결혼을 앞둔 성공한 소설가 민우(강동원)가 첫사랑의 환영에 시달리는 얘기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고 마침내 기억 한편에 묻어두었던 첫사랑의 기억을 찾아낸다. 그러나 분명치 않다. 그것이 실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민우의 환상인지, 아니면 그가 쓴 소설인지.
감독의 전략은 관객을 민우처럼 혼돈에 빠뜨리기다. “보통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혼돈스러워하는데도 관객은 혼돈 없이 이야기를 쫓아간다. ‘M’에선 관객이 민우의 악몽과 혼돈을 그대로 느끼길 바랐다.” 영화는 내내 불안한 민우의 내면을 쫓아간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미로에 갇히고, ‘데자뷔’처럼 뱅뱅 맴돈다. 일상은, 감독이 좋아하는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기이한 모습을 드러낸다.

고약한 현실 이겨내는 ‘꿈’
‘M’은 꿈결 같은 영화이자 꿈에 대한 영화다. 삶은 곧 꿈이라는 감독의 철학도 녹아 있다. 이명세는 실제로도 꿈을 많이 꾼다. 오즈나 히치콕, 그가 조감독을 지낸 김수용 감독들이 등장한다. 히치콕으로부터 ‘M’이라는 책자를 건네받은 꿈에서 출발한 영화가 ‘M’이라는 것도 이미 알려졌다.

꿈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어이기도 하다. ‘개그맨’은 전체가 주인공 안성기가 꾸는 꿈이었다. ‘남자는 괴로워’의 안성기는 의자를 타고 사무실 안을 날아다니는 꿈을 꿨다.꿈은 그에게 환상이며 판타지이다. 고약한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이자 실체와 허상, 참과 거짓의 경계를 묻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 규정하려 할수록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실체와 멀어지는 ‘이성’의 세계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실제 개인으로서도 그는 현실보다 꿈을 산다. 당연히 영원히 철들지 않는 환상소년이다. “나는 현실을 제대로 살아본 기억이 없다. 내 삶은 오직 영화다. 내가 영화 8편을 만들었으니 하나에 2년씩만 치면 내 영화적 나이는 이제 열여섯이다.”

“영화와 사랑은 내게 동의어”
‘M’은 이명세가 결국은 멜로 감독이라는 것도 보여줬다. 그러나 이 말은 ‘M’을 싫어한 사람들이 그랬듯 ‘M’이 뻔한 첫사랑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이명세의 첫사랑은 곧 영화이며, 그에게 영화는 사랑과 동의어라는 뜻이다.

“내게 있어 사랑은 남녀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고 ‘도’랑 비슷하다. 난 이기주의자라 사랑을 쫓을 수는 있지만 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첫사랑에 주목하는 것은 그 안에 시간의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이 왜 아름다운가. 흘러가 버려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붙잡을 수 없다는 데 영화의 비밀도 숨어 있다. 불꽃놀이 같은 거다. 소멸되는, 찰나의 아름다움.”

사랑에 대한 경험담도 털어놨다. “고등학생 때 1년간 지독한 짝사랑을 했다. 그런데 어느 가을 햇살 아래 소녀가 아름답게 서 있는데 갑자기 감정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내가 쫓은 건 환영이었구나. 그 무렵 감독이 되는 꿈을 꾸고, 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과 영화는 내게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영화가 무엇인가란 질문은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영화의 법칙은 사랑의 법칙과도 같고. 이를테면 관객은 연애대상이다. 영화는 연애편지고.”

빼어난 영화는 많지만 그에 매혹되는 영화는 많지 않다. 이를테면 이명세의 영화는 이미지가 만드는 황홀경으로, 유혹하는 영화, 홀리는 영화다. 그가 배우 중 가장 유혹적 이미지를 가진 강동원을 페르소나로 삼은 것은 그런 점에서 아주 적절해 보인다. 감독이 “정신적 유전자가 같다”고 표현하는 강동원은 “앞으로 이명세 감독의 모든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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