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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노인 노모살해-전남 고향마을 현지 르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10일 오후 전남 고흥경찰서 유치장.90대 노모를 목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된 金洪斗노인(70)은 기력이 다한 탓인지쇠창살 안쪽에서 탈진상태로 벽쪽을 향해 쪼그려 누워 있었다.金노인은 이날 오전 어머니를 가매장한 전남고흥군도 화면당오리 고향마을 뒷산의 부인 묘소 근처에서 양손에 수갑을 찬채 현장검증을 실시한뒤 경찰서로 돌아온 것.
이 사건을 조사한 한 경찰관은『金씨가 시종일관 눈물을 흘리며죽게 해달라고 아픈 심정을 토로해 부모를 둔 자식의 입장에서 효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깨달았다』고 말했다.
金노인은 이날 현장검증 하는 자리에서『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천벌을 저질렀다』며『혼자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면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았을텐데….
나는 먼저 가지만 부디 형제간에 우애하며 화목하게 살기 바란다』고 자식들에게 부탁하는 말을 남겨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金노인의「노모 살해사건」은 최근 젊은 세대의 부모학대.봉양거부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자신의 능력으론 더이상 홀어머니를 모실 수 없는 처지를 비관,결국 「살인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던지고 있다.
너무도 안타까운 金노인의 불행은 1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서로 의지하며 살던 아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홀어머니 林酉秀씨(92)를 모시고 7남매의 다복한 가정을 꾸려온 金노인은 갯벌에 일나갔던 아내가 느닷없는 중풍으로 쓰러지자 3년동안 갖은 수발을 하면서 보살폈다.그러나 결국 82년 사별하고 말았다.
고향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金노인은 그 당시 여든이 넘은 홀어머니와 병석에 누운 아내에게는 고깃국을 끓여먹이고 자신과 아들은 남은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는 것.
아내가 숨지고 3남4녀의 자녀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버리자 金노인은 1년쯤 고향에서 어머니를 더 모시고 살다가 큰 아들(47.경기도안산시 거주)과 작은 아들(42.서울거주)의 성화로 4백여평의 밭뙈기와 집을 팔고 고향을 떠났다.그러 나 그때부터金노인과 홀어머니의 떠돌이 생활은 시작됐으며 아들.며느리의 눈총과 구박을 견디지 못한채 2~3개월 간격으로 아들.딸집을 전전했다. 또한 비교적 어머니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여동생 判禮씨(64)가 사는 여수에도 종종 내려가 함께 살기도 했다.
그러다 3년전「남의 집」같은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고흥군도화면당오리로 돌아가 동오치부락 야산 비탈의 빈집에서 홀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했다.
수백m 떨어진 냇가에서 노모의 빨랫감을 세탁하고 물을 길어오는등 어머니 봉양에 극진했던 金노인은 동네 주민들에게『혼자남은어머니 걱정 때문에 죽지도 못할 형편』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다.
마을주민 金孫玉노인(72)은 『金씨가 마을에 내려와 동네 사람들과 술 한잔 하다가도 끼니 때가 되면 어머니 밥상을 차려드려야 한다며 귀가했다』며『이곳 마을에는 洪斗처럼 자식들과 헤어져 외롭게 살아 가는 노인들이 한두명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金노인은 지난해 3남 정선씨(35)가 장가도 가지 못한채 교통사고로 비명 횡사하자 끼니를 거른채 폭음,세차례에 걸친 탈장.위절제수술을 하는 바람에 자신의 몸조차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할수 없이「정말로 가기싫은」안산.서울등의 아들집에서 1년여동안 전전하며 기거하던 金노인 모자는 지난달 23일 여수 여동생집에 들렀다가 가족들 몰래 빠져나와 고향에 있는 부인의 묘 근처에서 삶과 죽음으로 이별하고 말았다.
金노인 사건소식을 접한 이 마을 李允柱씨(64)는『정부에서 노인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이 사건이 젊은이들에게 효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高興=具斗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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