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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멘틱 코미디 '사랑할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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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피임은 안해도 되나?"

"폐경된 지 오래됐어요. 그보다 당신 혈압은 괜찮아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남녀 주인공이 침대에서 주고받는 대화치곤 그야말로 '으악'이다. 사랑이 이뤄지려면 일정량의 내숭은 필수이고, 로맨틱 코미디가 흥행하려면 현실이야 어쨌건 팬터지를 만족시켜줘야 하지만 이건 너무 적나라한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했다면 적어도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을 볼 때 만큼은 그런 고정관념을 접어두자. 이혼 경력을 지닌 50대 독신 여성과 고혈압 때문에 응급실 가기를 제 집 드나들 듯하는 60대 남성이라는 설정부터가 범상치 않다. 그리고, 그 설정은 때론 날카롭고 때론 재치있고 때론 포근한 유머와 포개져 청춘 스타를 기용한 그 어떤 로맨스물 못지않은 호소력을 갖는다.

이 영화는 새로워서 좋다. 중년의 사랑에 대한 정형적 묘사를 상당히 비켜간다. 중년 남성이 소녀에게 연정을 느낀다는 '롤리타'식이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주부가 연하의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언페이스풀'류가 아니란 얘기다. 사랑의 빛깔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핑크빛이라는 것,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사랑에 상처받고 사랑에 희망을 갖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중년의 사랑이 완성도가 높을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인간적 약점을 이해하고 채워줄 수 있는 세월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사랑할 때…'은 오래 살아보지 않으면 결코 실감할 수 없는 인생의 비밀스런 메시지를 말 그대로 앙증맞고도 산뜻하게 전해준다.

예순이 넘어서도 결혼은 하지 않고 젊은 여자들과 연애만 즐기는 해리(잭 니컬슨)는 30년 넘게 차이나는 마린(아만다 피트)과 열애 중이다. 마린의 엄마이자 저명한 희곡 작가인 에리카(다이앤 키튼)의 별장에 놀러간 해리는 마린과 처음 관계를 하려던 찰나 심장발작을 일으킨다. 에리카는 얼떨결에 자신의 별장에서 해리가 회복하는 것을 돕게 된다. 해리를 진찰한 매력적인 젊은 의사 줄리언(키아누 리브스)은 평소 흠모하던 작가인 에리카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연정으로 발전한다. 물론 이런 감정은 둘 모두에게 낯설다. 에리카는 비아그라를 먹고 심장 발작까지 일으켜 가며 속칭 '영계'를 밝히는 해리가 속물같기만 하다. 게다가 응급실에서 환자복 사이로 비어져 나온 투실투실한 엉덩이도 봐버렸다. 무엇보다 내 인생에 사랑은 이제 끝났다고 체념하던 터였다. 한편 해리는 부담 없이 사귀고 헤어질 수 있는 젊은 여자가 마냥 좋다. 그러나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사람은 언젠가는 기댈 곳을 원하게 마련이다. 해리가 한밤중에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듯이.

잭 니컬슨과 다이앤 키튼의 연기는 초절정 고수들의 그것이어서 뭐라 얘기하는 것이 사족으로 보일 정도다.'버라이어티'지는 실제 생활에서도 바람둥이로 소문난 니컬슨의 연기를 두고 "잭 니컬슨이 잭 니컬슨을 연기한다"고 평했다. 키튼을 우디 앨런 영화에 단골 출연하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여배우 정도로만 여겼다면 이 영화는 그녀를 재발견하는 기회다.

특히 실연한 뒤 엉엉 우는 연기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키튼은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왓 위민 원트'의 낸시 메이어스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1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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