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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0대 현역’ 노대가들의 예술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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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보현, 아틀리에에서의 백일몽Ⅱ, 캔버스에 아크릴, 198×153㎝, 1981

만추의 정서가 전시장을 가득 적시는 이 가을, 노(老) 대가들의 개인전도 잇따르고 있다. 70∼90대 ‘현역’들이다. 작가의 장수는 그 자신에게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축복이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아우르는 조형 세계의 변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이한 두 인생의 화업결산=같은 추상회화 계열의 김보현(90) 화백과 이준(88) 화백이 화업 60년을 결산한다. 살아온 역정만큼이나 전시장 분위기도 다르다. 김보현 화백은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공간 속에서 때론 좌익으로, 때론 우익으로 몰리며 영문 모르고 고문 당하다 1955년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다. 넥타이 공장서 시간당 1달러를 벌며 근근이 살았던 그가 국제 무대에서 화가로 우뚝 선 뒤 백발 성성한 노인이 돼 고국에 돌아왔다. 95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회고전 때 “격정적인 터치의 무서운 신인이 나타났다”는 말이 돌기까지 그는 철저히 잊혀진 인물이었다. 50년대 추상표현주의, 70년대 야채를 소재삼은 극사실주의 등 정반대의 경향을 흡수한 노대가는 80년대 이후 비로소 자유롭고 천진하게 삶의 고통과 기쁨을 표현하는 완숙기에 도달했다. 노대가의 작품 220여점을 시대순으로 보여주는 ‘고통과 환희의 변주:김보현의 화업 60년전’은 내년 1월 6일까지 덕수궁미술관(02-2022-0600)서 열린다.

이준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은 경기도 고양 아람미술관(031-960-0180)에서 12월 2일까지 ‘자연의 빛으로 엮은 추상’전을 연다. 53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이화여대 미대 교수로 30년 근속했다. 짐짓 차가운 인상일 것 같은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했지만 색은 우리 조각보, 돗자리 등에서 보이는 전통 문양의 그것이다. 줄곧 밝은 색을 즐겨 젊은 작가의 작품 아닌가 싶도록 발랄하다. 요즘도 하루 8시간씩 붓을 잡는다고 한다.

최종태, 기도하는 사람, 나무, 26.7×22×85㎝, 2006(左). 이준, 축제B, 캔버스에 아크릴, 162×162㎝, 2004(右).  

◆70대 현역들의 신작전=‘물방울’의 화가 김창열(78) 화백은 올해 새로 제작한 ‘회귀’ 시리즈 20여점으로 전시를 열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구관(옛 K옥션 자리, 02-734-6111)에서 11월 11일까지 여는 개인전이다. 그는 66년부터 뉴욕서 유학한 뒤 71년부터 지금까지 파리에서 활동하는 국제적 작가다. 2004년 1월 파리의 쥐드폼 국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 데 이어 2005년 5월 한국 화가로는 최초로 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 초대전을 열며 세계적인 ‘물방울 화가’로서 위치를 재확인했다.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외곬로 자기만의 세계에 매달려 온 조각가 최종태(75)도 근작을 선보인다. 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조각의 근본문제인 ‘형상’과 ‘정신’에 대한 치열하고도 지속적인 고민으로 오늘날 조각계에 우뚝 섰다. 11월 11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서 ‘구도의 여정-최종태 개인전’을 연다. 나무·브론즈·돌 조각 40여점과 파스텔화·묵화·수채화 60여점을 오랜만에 내보이는 자리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근래 힘들이고 있는 수채화와 채색 목조각이 나왔다. 형태를 덜고 또 덜어 원형질만 남김으로써 정신성을 형상화한 노장은 요즘 색에 관심이 많다.

전통적 미감의 현대적 표현을 추구해 온 윤명로(71) 화백은 남산 표갤러리(02-790-1498)에서 11월 9일까지 개인전을 연다. 서양화에서 출발해 60년대 이후 국내 전위미술을 주도해 온 그는 2000년대부터 겸재로 대표되는 한국화와 만났다. 바로 공기 중에서 산화되는 쇳가루를 안료 삼은 ‘겸재 예찬’ 연작이다. 겸재 정선의 수묵화 속 기암괴석을 연상시키는 추상화를 그린 그는 2006년 이후 그린 신작을 내놓았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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