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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과거청산' 놓고 시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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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8일 바티칸 광장에서 스페인의 순교자 498명에 대한 시복식이 열렸다. 시복식은 가톨릭에서 순교자를 사후에 복자(福者)로 추대하는 의식이다. 한꺼번에 500명 가까운 사람을 복자로 추대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잔치 분위기였을 것 같지만 반기지 않는 쪽도 적지 않다.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도 이날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유는 순교자들이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에 반대하던 공화파가 죽인 가톨릭 지도자 또는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프랑코 시대의 과거사 청산을 부르짖는 좌파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총선을 5개월여 앞둔 스페인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좌우로 나뉘어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가 27일 보도했다.

◆과거사 청산이냐 역사의 상처 덧내기냐=사회당의 사파테로 총리는 2004년 집권 이후 과거사 청산에 공을 들여 왔다. 36년간 지속된 프랑코 독재 시대의 사람들이 여전히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데다 사회의 큰 틀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유다. 그는 진정한 민주화는 과거사 청산을 한 뒤에나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코 독재 시대 희생자 명예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성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게 현지의 평가다. 그 때문에 사파테로 총리는 총선을 앞두고 가시적 결과를 내놓기 위해 분주히 뛰고 있다. 그는 특히 스페인 내전 당시부터 프랑코 측의 핵심 지지 세력이었던 가톨릭 교회가 더 이상 스페인 사회의 정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앞장서고 있다. 가톨릭이 반대하는 동성애자의 결혼, 이혼 절차 간소화 등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나온 스페인 내란 당시 순교자의 시복식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러나 그들 역시 불행한 역사의 희생자라는 점은 사회당 정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좌파 정부는 이번 시복식에서 정치적인 색깔을 빼기 위해 부심하는 모습이다.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는 과거사 청산에 반발한다. 프랑코 시대가 끝난 지 이미 30년이 흘렀고 사회적 '화합' 을 위해 정치적 보복 행위를 못하도록 한 신민주헌법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국민당 측은 "사회당은 과거사 청산을 하려는 게 아니라 역사의 상처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 역시 "사파테로 총리가 과거의 아픈 기억을 들춰내 국민에게 복수심을 불어넣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고 비난했다. 총선까지 남은 5개월 동안 선거 판의 이슈는 과거사 청산과 이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될 것으로 보인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스페인 내전=1936년 좌파의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선 뒤 정교분리.농지개혁 등의 급진적인 정책을 펴자 프랑코 장군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생긴 내란. 스페인 사회가 둘로 나뉘어 2년여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프랑코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1939년 정권을 잡았다. 프랑코 측과 이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싸우면서 전쟁터에서만 30만 명이 숨졌고 기아 등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100만 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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