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3.실종 ○45 그애는 대답 대신 나지막히 노래를 불렀다.When I was young… I never needed anyone… 고음의 노래를 나지막히 불렀다.나도 아는 노래였다.
Eric Carmen의 「All By Myself」였다.그 노래가 그렇게 애절하게 들리기는 난생 처음이었다.그애가 잔뜩 감정을 넣어서 불렀기 때문은 아니었다.그애는 나지막히 담담하게 노래 불렀다.
어렸을 땐 아무도 필요하지 않았어 사랑도 그냥 장난 같았지 그런 시절도 다 지나가 버렸지만… 텅 빈 창밖,낯선 아파트,멀리서 간혹 자동차가 질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조용한 새벽 네 시쯤… 그래서였을까.어둑어둑한 거실 안을 맴도는 그애의토막난 노랫소리가 어쩐지 나를 찡하게 만들었다.
더이상 혼자인 건 싫어… 그애가 후렴부분을 반복해서 부를 때에는 나도 함께 자그마하게 따라 불렀다.목이 잠겨서 잘 되지는않았지만.
All by myself anymore … All by myself anymore… 노래를 그치면서 그애가 빙긋이 미소짓는 것이 보였다.정말이지 텅 빈 웃음이어서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누군가는 있을 것 아냐.가령 엄마라든지….』『엄만 일본에 가버렸어.여기가 지긋지긋하고 재미가 없다면서.왜냐하면 엄마의 애인이 일본으로 가버렸거든.어쨌든 되게 바쁜 척하는 여자라구.그리구 아빤… 아빠는 미국에 사는데,여기저길 돌아다니지만 어쨌든 미국에 사는 거지,어쨌든 엄마 보다 훨씬 더바쁜 남자야.』 계집애가 말을 끊고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새 담배에 또 불을 붙였다.나는 가만히 기다렸는데 그애는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말해봐.』 『듣구 싶니.너한텐 아무 소용도 없는 이야길텐데.』 『해봐.니가 노래하는데 기분이 이상했었어.』계집애가 또 소리없이 웃다가 말했다.
『아빤 원래 너무나 바쁘고 복잡한 일이 많고 그런 사람이야.
일년이면 여덟 달은 해외에 나가 있었구,원래부터 그랬어.원래라는 건…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라는 뜻이야.그리구 엄마한테는 남자친구들이 많았어.그래,생각해보니까 이것도 원래부터 그랬어.우리 엄만 멋쟁이야.그래 원래부터 말이야.그리구… 나한테는중학교 3학년 때 남자친구가 생겼지.』 『애인같은 거였니.아니면 그냥 친구…?』 『그게 그거인 거 아니니.사실은 2학년 때부터 만났어.그 남자앤 그때 고1이었구,우린 다른애들처럼 겨울에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거야.장갑 낀 손을 잡구 스케이트를 타구 오뎅같은 거 사먹구 영화구경도 가구 극장에서는 장갑을 벗구맨손 을 잡구… 어쨌든 그냥 장난이었어.그냥 남자애랑 있으면 좋았어.그래서 중3때였는데… 어쨌든 우린 집에 들어가지 않고 둘이서 같이 잤어.옆방에서 말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싸구려 여인숙에서 말이야.니가 아무렇게 생각해도 좋아.니 생각이 맞을 테니까.다음날 집에 갔더니 집에 아무도 없었어.나중에 엄마가 들어왔지.엄마는 핸드백을 휘두르면서 나를 때렸어.때리면서 막 악을 쓰는 거야.나가.이 웬수같은 년야,당장 나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