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정글 자본주의' '약육강식 경제' 표현의 오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6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해선 안 될 일이 있다. 표 얻을 욕심으로 있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사람들을 편 가르기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라야 어찌 되건 어떻게든 표를 모아 당선되겠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후보가 있어 걱정이다.

정동영 후보가 정글 자본주의란 표현을 썼다. 경제학 사전에 없는 얘기라 생뚱하긴 하지만,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그의 앞뒤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시장 만능주의’란 표현을 썼다. ‘20%만 잘살고 80%는 버려지는 2대8 사회’ ‘돈 있고 땅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약육강식 경제’란 말도 썼다. 결국 정글 자본주의란 약육강식의 경제, 승자가 모든 걸 가져가는 경제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반영한 말이 아니다. 아무리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해도 정글 자본주의를 하고 있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공동체(나라)가 유지되지 않는다. 물론 빈부격차가 줄어들지 않거나 심화되는 경우는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고심하는 나라도 많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약육강식’을 드러내 놓고 허용하는 나라는 없다.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분배 사정이 나은 우리나라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가령 자영업자들이 주로 내는 종합소득세를 보자. 전체 자영업자가 436만 명인데, 이 중 0.1%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사람(5000여 명)이 내는 종합소득세가 무려 25%를 넘는다. 또 소득 상위자 10%가 내는 종합소득세는 81%나 된다. 이는 근로소득세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전체 임금 근로자 수는 1300만 명 정도다. 이 중 0.4%에 해당하는 5만여 명이 내는 세금이 무려 2조원을 넘는다. 전체 근로소득세의 24%란 얘기다. 또 1300만 명 근로자 가운데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나 된다.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라고 해서 한 푼도 안 내는 사람보다 나라에서 혜택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고액 납세자라고 차가 막힐 때 길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치안이나 국방 서비스를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고액 납세자들이 큰 불평을 하지 않는 건 아직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돈 많은 자신들이 비용을 더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약육강식의 경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짓밟기만 하는 경제는 아니란 얘기다.

이처럼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용어를 쓰는 데는 목적이 있을 게다. 용어의 파괴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령 우리나라가 정글 자본주의가 아니란 얘기를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논리적으로 일일이 따지면서 설명해야 하지만, 정글 자본주의란 말은 그 자체로 모든 설명이 완료된다. 사람들 맘속에 확 와 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표 얻기 전략’은 자칫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게 경제학의 결론이다. 수많은 나라의 투표 행태를 오랫동안 분석한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정치인은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견해를 대변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좌나 우처럼 특정 부류의 계층을 대변하면 잃을 표가 훨씬 많다는 이유에서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중간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라고 정의했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이 내거는 공약이나 정책이 비슷해졌다. 이기기 위해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 마음에 드는 정책이나 공약을 제시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김영욱 경제연구소 부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