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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고원을넘어서>5.카시카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長安(西安)을 떠난 카라반이 실크로드를 따라 大秦(로마)으로가는 길에 中國땅에서 마지막으로 묵는 오아시스가 타클라마칸사막의 서쪽끝 카시카르(喀什喝爾)였다.長安에서 장장 3천7백㎞-1년 가까이 걸리던 길이었다.
「만약 당신이 新疆에 가고도 카시카르에 들르지 않았다면 新彊을 못본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이곳은 동서 교역과 文化의 중심지였으며 여러 민족의 교류가 잦았던 곳이다.이곳으로부터 계속 서쪽으로는 舊소련의 키르기스.우즈베크.타지크와 이란.아프가니스탄으로,남쪽으로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파키스탄과 인도로 가는 길이 있다.
카시(카시카르의 약칭)는 실크로드가 가장 활기에 차있던 기원전 2세기부터 15세기까지 가장 번성했다.
그러나 15세기께부터 海洋路의 발달로 실크로드는 쇠퇴하기 시작했고,이 도시도 발전을 멈췄다.
이곳 시장골목을 찾았을 때 전면이 3~4m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상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사이에 대장간.솜틀집.악기만드는 집.금은 세공점등이 끼여 있고,그곳에서 들리는 가지각색의 소리와 양고기 케밥(꼬치)을 굽는 냄새,나귀가 끄는 달구지들이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길가로 베일을 쓴 여인네들과 흰수염에 터번을 두른 노인네들이 오가는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몇세기 뒤로 돌려놓은 것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또한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접어들면 몇백년전에 지었을법한 토담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동네마다 조그마한 모스크들이 있는 것이 어느 中東지역의 중세도시를 방불케 한다.
6백년전 베네치아에서 중국으로 오는 도중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이 지방은 매우 크며 도시와 城이많은데 그중에서도 카시카르는 가장 크며 또한 중요하다.주민은 마호메트를 믿고 특유한 언어를 쓰며 상업과 제조 업으로 생활한다.이 지방의 상인들은 세계 각지를 찾아다니며 장사한다」고 썼다.
시가 중심에는 서성 최대의 이슬람사원인 아이티가사원이 있다전에는 이슬람대학이었다는 이사원에는 오늘도 오후3시엔 어김없이수천명의 신도들이 기도하러 몰려든다.
원래 이지역은 불교도들이 살고 있었으나 10세기께 서아시아로부터 흘러들어온 위구르족에 의해 중국에선 최초로 이슬람화 되었다. 시가지 중심으로부터 북쪽으로 3KM쯤되는 곳에 마호메트의직계후손이라고 전해진 코자 일족의 묘지인 향기묘가 있다.
커다란 돔양식으로 건축된 이묘소 건물의 전면은 푸른색의 옛타일로 장식왜있어 매우 아름답다.
마호메트 직계후손의묘-카시카르란 원래 위구르어로 유리 타일로덮인 지붕이란 뜻이다.아마도 옛날 이곳엔 유리타일로 장식한 건축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코자 일족은 17세기 카시에서 정치.종교의 실권을 쥐었던 지배계층이었다. 그래서 위구르인들은 지금도 이묘지를 성스러운 곳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곳에 묻히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가 어느날 꿈을꾸었는데 꿈속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온세상을 수소문해 바로 이카시에서 그여인을 찾았다.황제는 몸에서 항상 향기가 감돌았다는 이 여인을 궁으로 데려와 비로 삼으려 했으나 그녀는황제의 청을 끝내 거절하고 언제나 창가에 서서 두고온 고향생각을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황태후가 이여인을 죽였다고 하며 그후 이여인의 고향에 대한 연민의 정을 기려 향비묘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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