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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쩡칭훙 건재 … 타협의 ‘삼두정치’ 체제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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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08면

중국 공산당 17차 당대회 폐막식이 2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됐다. 여전한 영향력을 보여준 장쩌민(오른쪽) 전 국가주석이 퇴장에 앞서 후진타오 주석과 악수를 하고 있다. [베이징 로이터=연합뉴스]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에게는 ‘약한 지도자(弱勢領袖)’라는 인상평이 따라다닌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전임자인 장쩌민(江澤民) 등 그에 앞서 중국 권력을 주름잡았던 지도자들의 인상에 비해 뭔가 다소 약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17차 대회 결산 #집권 2기 후진타오, 세력 구축 성공했지만 .권력 핵심. 장악은 실패

또 덩샤오핑이 설계하고 만들었던 집단지도체제의 1기 졸업생인 장쩌민의 영향력이 그의 집권 전반기(2002~2007)에 강력하게 행사됐다. 따라서 후 주석의 전반기 실제 권력운용에는 여러 제약이 따랐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의 약세를 거론하는 또 하나의 근거다.

21일 폐막한 공산당 17차 전국대표대회(17大)에서 그는 이런 약한 모습을 벗었을까. 집권 후반기(2007~2012)를 맞는 그는 확고한 권력을 쥐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전반적인 세력 구축에는 성공했으나 권력 핵심 영역에서는 여전히 약세를 면치 못할 상황이다.

절반의 성공

중국 공산당의 명목상 최고 의결기구는 당 대표대회에서 선출하는 중앙위원회다. 이번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은 모두 204명이다. 이 가운데 후 주석을 지지하는 그룹은 40명 정도로 분류된다. 2002년에 열렸던 16차 당대회의 중앙위원 중 지지자가 26명이었던 것에 비해 괄목할 만한 진전이다. 이는 10년 전 15차 당대회에서 장쩌민 전 주석이 자신의 추종자를 중앙위원에 포진시킨 수준과 비슷하다.

2003년에 그가 제시한 ‘과학발전관’이 당의 헌장인 당장(黨章)에 오른 것도 후 주석의 큰 수확이다. 마오쩌둥 사상과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이 당장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그 권력자가 현직에 있었을 때 이뤄지기 힘든 일이다. 사망 후, 또는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 이뤄지는 게 보통이다. 후 주석은 그가 재임하는 시기에 자신의 이론을 당장에 올렸다.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마오쩌둥과 같은 경우다. 그와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장쩌민과 쩡칭훙(曾慶紅), 나아가 퇴직한 원로들의 광범위한 수긍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는 쩡칭훙이 연령상의 이유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난 점도 그에게는 이득이 될 수 있다. 후 주석만이 새로 뽑힌 상무위원 중 유일하게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인맥을 쌓고 있다. 당 조직과 해방군 인사에 깊이 관여해 영향력을 지녔던 쩡칭훙 전 위원의 퇴임으로 군에 관한 후 주석의 힘은 더 강해졌다는 분석이다.

중앙에서는 여전한 약세

중앙위원회는 정치국이 관리한다. 25명으로 이뤄진 정치국과 그 상급 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 권력판도를 모두 살필 수 있는 장이다. 17대가 만들어낸 정치국에서 후 주석의 지지자는 모두 9명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장쩌민 전 주석의 지지자는 6명, 쩡칭훙 전 부주석의 계열은 5명 정도에 달한다. 나머지 5명은 해방군 계열의 중립자들이다.

일단 정치국원 수에서는 후 주석이 앞선다. 그러나 전임자 장쩌민이 15차 당대회(1997년)에서 정치국원 중 절반에 달하는 자리를 자기 계열의 인사로 채운 것에 비하면 큰 차이를 보인다. 문제는 정치국을 통할하는 상무위원회 인선에서도 후 주석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9명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에서 후 주석은 자신을 포함해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신임 리커창(李克强)을 규합할 수 있다. 물러난 쩡칭훙 전 부주석이 영향을 미치는 인물도 3명에 달한다. 새로 뽑힌 시진핑(習近平)과 허궈창(賀國强) 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저우융캉(周永康) 정법위 서기다. 장쩌민 전 주석도 우방궈(吳邦國)·자칭린(賈慶林)·리창춘(李長春) 등 3인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의 최고 통치기구인 상무위원회에서는 후 주석과 장쩌민·쩡칭훙이 세력을 균점한 형국이다.

후 주석의 약한 영향력은 차기 후계자 인선에서도 드러났다. 50대 초반인 시진핑과 리커창이 차기 후계자로 부상했지만 후 주석이 밀었던 사람은 리커창이다. 상무위원에 오른 두 사람의 서열은 시진핑이 6위, 리커창이 7위다. 이 서열대로 진행되면 후 주석의 퇴임 뒤에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맡을 사람은 시진핑이다. 후계 구도에서도 후 주석은 자신의 뜻을 성사시키지 못한 셈이다.

과감한 정치개혁 어렵다

덩샤오핑은 1989년 장쩌민을 총서기로 내세우면서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했다. 최고 권력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면서 야기되는 이념적 과잉, 국정의 혼선을 막기 위해서다. 이 집단지도체제는 균형과 견제라는 틀을 만들어내면서 이제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17대에서도 후계 그룹의 부상이 각 파벌 간의 타협으로 큰 무리 없이 이뤄졌다. 집단지도체제가 잘 순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의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절묘한 세력 균형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최고위 지도자가 세력 균점의 덫에 걸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강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각 계파 간의 끝없는 타협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중국 경제에는 집단지도체제가 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개혁과 같은 민감한 영역에서는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임 장쩌민 주석에 비해 후진타오의 권력은 약하다. 당 중앙위원과 지방 당정 영역에서 세력을 부식(扶植)하는 데 성공은 했지만 정치국과 상무위원회에서 힘을 키우는 데에서는 실패했다. 장쩌민 전 주석이 비록 집단지도체제에서지만 강한 권력을 형성한 것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당대회가 폐막한 뒤 홍콩 등의 전문가 그룹에서는 “전체적인 세력을 얻었지만 최고 의결기구인 정치국과 상무위원회에서 후진타오는 다양한 견제를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특히 당 관료의 철저한 부패 근절과 각 당정 기구에서의 민주적 절차를 크게 확대하는 등의 과감한 정치개혁은 후진타오 집권 2기 동안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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