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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귄터 그라스의 '라스트 댄스'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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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7)가 색연필.목탄 등으로 직접 그린 그림 32점에 시 36편을 보탠 시화집(詩畵集) '라스트 댄스' (민음사)가 출간됐다.

그라스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과 베를린 조형예술대학에서 판화와 조각을 공부했다. 1997년에는 수채화를 곁들인 시화집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습득물'을 펴낸 바 있다.

이번 시화집을 관통하는 그라스의 관심 대상은 역시 춤, 그리고 섹스다. 그라스는 '신(神)처럼'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춤들인 원스텝.래그타임 등을 회상하며 춤과의 인연을 밝히기도 하고, '일찍 배웠다'에서는 "원스텝은 아주 단순하다./신사는 숙녀를 끌어당기고/숙녀는 신사를 살짝 밀어낸다"며 춤동작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남녀 간의 교섭은 종종 에로틱하게 얽혀든다. 그라스는 '일찍 배웠다' 후반부에서 신사가 밀어붙여 쓰러지는 숙녀를 신사가 붙드는 순간 신사의 무릎은 숙녀의 희열에 가 닿았다고 묘사한다.

'아랍 여인의 베일의 춤'은 모든 짜임을 훤히 비춘다는 점에서 도발적이지만, 결정적인 핵심은 결코 보여주지 않고 은폐한다는 점에서 보는 사람을 조바심치며 약간 긴장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려진다.

시화집 후반부에 등장하는 짧은 시 14편과 그에 맞물린 그림들은 노골적으로 자극적이다.

이를테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에서는 "짐승처럼/우리는 서로를 맛보았다"는 구절로 시작하고, '발트 해 위에서'에서는 남녀가 "몸을 섞은 채 이륙한다"고 썼다.

붉은 색연필로 그린 그림들은 도색 잡지에서나 등장할 법한 '체위'들을 묘사했다. 자극적인 시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조금 느닷없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서로를 탐닉하는 남녀의 사랑의 과정은 사실 일종의 안무에 빗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라스는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 '일찍 배웠다'에서 열네살의 화자가 열일곱살의 그녀와 춤추는 동안 "진짜 사내들은 멀리/전쟁터에 있었다."고 밝히고, '밀리터리 블루스'에서는 아직도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한 흑인들의 현실을 비꼰다.

거칠고 힘차게 마무리된 독일 표현주의 풍의 그림들은 시에 따라붙여진 단순한 삽화이기를 거부한다. 종종 시의 언어들과 부딪치면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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