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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중독증이 무서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SBS의 야심작 ‘로비스트’ 첫 회 하던 날, 고민하다가 MBC ‘태왕사신기’로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가 끝나니 밤 11시15분쯤. 60분이 넘는 드라마를 보고 채널을 돌렸더니 허걱! ‘로비스트’는 아직도 첫 회가 끝나지 않았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게다가 ‘잠시 후에 2부가 이어진다’는 자막까지 뜬다. 결국 그날은 12시30분이 돼서야 드라마가 끝났더라는 말씀. 월·화요일 저녁도 비슷하다. ‘왕과 나’ ‘이산’ 두 드라마는 누가 누가 더 오래 하나 경쟁하듯 훌쩍 60분을 넘긴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면 걸리는 병 같은 건 없을까? 만약 있다면 아마 나와 시청자들은 이 병에 단단히 걸려 있을 게다. 아침에 눈을 뜨면 7시50분에 ‘그래도 좋아’ 보고 8시30분 ‘미워도 좋아’, 9시 ‘착한 여자 백일홍’으로 한번 달려주신다. 잠깐 아침 먹고 11시부터 다시 ‘커피프린스’와 ‘경성스캔들’ ‘주몽’ 재방송 시리즈로 두어 시간 보낸다. 밤 10시대의 드라마 전쟁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요즘은 변칙 편성으로 시간이 대폭 늘어나기 일쑤다. 주말에도 쉴 틈 없다.

저녁 8시에 시작해 9시40분 드라마, 여기에 11시대 드라마까지 나왔다. 지난 일요일엔 ‘로비스트’를 무려 네 시간 넘게 연속 재방영해 댔다. 이 정도 되면 드라마 폭격이다.

방송사는 드라마 ‘편성의 묘’를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흔히 말하는데, 요즘 같아선 편성의 묘가 뭐 필요할까 싶다. 그냥 안 하던 시간대에 드라마를 끼워 넣으면 틈새 타임을 개발하는 것이다. 저녁 드라마는 8시30분 일일드라마 시장에서 MBC가 7시45분대로 틈새를 공략하더니, 다시 SBS가 7시20분 매일 드라마를 들고 나왔다. 앞으로 저녁 6시 드라마, 5시 드라마, 혹은 밤 11시에도 시청률 떨어진 몇몇 오락 프로를 밀어내고 드라마가 편성되지 않을까 싶다.

드라마, 물론 좋아한다. 수백억원을 들인 판타지에 등장한 욘사마 배용준을 보며 흐뭇해하고, 사극을 보면서 역사 공부도 하고, 유치하다고 욕하는 아침 드라마나 ‘아현동 마님’도 몇 번 보다 보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그게 스토리의 힘, 드라마의 파워인가 보다.

그런데도 좀 걱정된다. 몸에 좋은 음식도 한 가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안 좋은 법. 이렇게 하루에 대여섯 가지의 드라마로 물량공격을 해대는 각 방송사들은 ‘시청률 경쟁’ 외에 말 꺼내기도 머쓱한 ‘공영방송’의 적절한 균형감각에 대해 고려는 하고 있는 걸까? 확실히 ‘공영 드라마 방송사’들의 드라마 물량공격 속에 뉴스나 보도 프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 프로 같은 건 완전히 구색 갖추기 정도로 밀려난 듯싶다. 웬만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드라마의 그물이 보장하는 시청률에 비하면 ‘쇼바이벌’이나 ‘느낌표!’ 같은 신선했던 프로들의 시청률은 보잘것없고, 그래서 이들은 쓸쓸히 이번 편성에서 잘려 나간단다.

바야흐로 대선이 2개월도 채 안 남았는데 어디서 제대로 후보들 한번 속 시원하게 몇 시간 소개해 주는 프로 보기가 힘들다. 드라마만 보게 되면 사실 그런 문제에 대한 균형감각도 살짝 어그러질 수도 있나보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날, 그 관련 프로그램이 나가느라 ‘태왕사신기’가 결방되자 시청자들의 반발 소리가 높았던 해프닝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드라마 편성 비율이 15%가 넘어 일본의 10% 선보다 훨씬 높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온 국민을 드라마 중독증 환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선 ‘드라마 쿼터제’가 필요하다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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