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화광동진(和光同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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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황지우(1952~) '화광동진(和光同塵)' 전문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날, 이제 보는 것을 멀리하자!
눈앞에서 모기들이 날아다닌다 비비니까는
폼페이 비극시인의 집에 축 늘어져 있던 검은 개가
거실에 들어와 냄새를 맡더니만은 베란다 쪽으로 나가버린다
TV도 재미없고 토요일에 대여섯개씩 빌려오던 비디오도 재미없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건 자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뜯긴 지붕으로 새어들어오는 빛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관한 몇 개의 기억이 있다. 시집 '전당포 아리랑'이 나왔을 적 출판사의 주간은 나를 비오는 강남터미널까지 배웅해 주었다. 푸른색 비닐 우산 아래 몸을 반씩 적시며 고통스러운 서울의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우산 위에서 신비하고 나직한 음악소리가 났다. 한 줌 코스모스 씨앗을 남기고 승희가 세상 떠났을 때 그의 프라이드를 타고 섬진강으로 갔다. 석양녘의 보리 익는 냄새 속에서 미친 듯 울다가 웃다가 나란히 서서 죄없는 강물줄기에 오줌을 뿌렸다. 성철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해인사에서 밤 사이 누군가가 차에 펑크를 냈다. 차의 주인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바람이 불고, 천천히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시간이 왔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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