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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길을 사랑하는 소시민 사진가 유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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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만난 길, 그녀와 새벽에 함께 걷던 길, 사랑이 끝난 뒤에 찾았던 길, 종종 마음이 쓸쓸해질 때면 찾는 길…. 길은 흙과 돌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연으로 빚어진다. 여기 유독 길을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다. 저마다 다른 감성과 다른 분위기를 내는 수천 개의 길 사진으로 미니홈페이지를 꾸릴 정도로 그의 길 사랑은 남다르다. 미니홈페이지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린 것도 바로 그 길 때문이다.
물안개가 면사포처럼 드리워진 어는 새벽길에 카메라 렌즈를 가만가만 조용히, 오랫동안 꼼짝 않고 들여다보는 어떤 남자가 있다면 유심히 마음에 새겨두라. 그가 혹시 바로 이 사내 ‘유철’인지도 모른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일 뿐이라며 수줍게 내빼며 한사코 인터뷰를 마다한 그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이야말로 길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겠는가. 아래는 그 인터뷰다.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요즘은 포토그래퍼라 불러도 무색치 않을 만큼 실력이 출중하신 분들도 많아요. 예전에는 SLR카메라를 전문가들이나 메고 다녔지만 이제는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갖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제가 별로 대단할 게 없죠. 사실 기분이 좋긴 해요. 사람들이 제 사진을 보면서 잠시나마 마음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쁩니다.

사진을 업으로 삼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소시민 사진가’들이 많아지는 최근의 추세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본인은 그 ‘소시민 사진가’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드시나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많은 시민 사진가들이 생겨나는 추세죠. ‘소시민 사진가’가 많아지는 건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사진 영역이 이렇게 크게 발전하는 이유는 그만큼 찍을거리가 많다는 뜻이죠. 계절의 변화가 분명하니까 그때마다 풍경들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지죠. 그 어떤 나라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전문 사진작가들만 그 아름다운 풍경을 누렸다면 이제는 모두의 것이 되었어요. 사진을 찍다보면 나름의 어려움이나 독특한 얘깃거리가 생기는데 이제 그런 것들도 모두의 얘기가 되었지요. 사진작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것이 다 풍부해지는 것 같아요.

본업은 무엇인지요?

경남 창원의 한 중소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사진과는 딱히 상관이 없는 일이죠? 원래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다 아시겠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그런 취미를 살릴 기회가 많지 않죠. 그러다가 어느 날 회사 사보에 제 사진이 실리게 됐어요. 아마 그게 어떤 작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그 이후로 꾸준하게 사진을 찍고, 포토에세이도 쓰기 시작했거든요. 그걸 온라인에 저장을 해둔 게 지금에 이른 거죠. 혼자 돌아다니며 사진 찍느라 아직 장가도 못 갔어요.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도…. 장가 못간 전형적인 경상도 총각이죠, 뭐.

일반인이 사진 작업을 꾸준히 하려면 남다른 각오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사진 감상도 좋아하는데, 남의 사진은 감상할 기회가 없잖아요. 함부로 보여주지도 않고. 그게 은근히 짜증나더라고요. ‘그까짓 사진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그냥 내가 찍고 만다.’ 약간 오기가 생겼다고 할까요? 사진을 정말로 사랑하면 남들이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안개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제게 있어 사진은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이 땅의 무한한 아름다움들을 나만의 서랍장에 저장해 놓고 주변 사람들과 아낌없이 공유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다 보니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듯이 촬영을 하게 되고, 좀 더 아름다운 시간과 공간을 담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팝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시간이 특히 아름다운 것 같아요.

주로 어디를 다니시나요?

지역별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인데도 아직도 가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자주 찾는 곳은 경남 창녕에 자리한 ‘우포늪’입니다. 삼억 년, 가늠치 못할 세월을 이 땅에서 함께한 이 오랜 늪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 매시 매분 늘 다른 모습으로 새 단장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죠. 그 외에도 사진가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전북 임실의 ‘옥정호’와 부산 ‘다대포’를 자주 가는 편입니다. 바쁜 직장인이라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서 훌쩍 다녀오곤 해요. 특히 아침풍경을 좋아해서 출근길에 사진기를 꺼내들 경우가 많지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는 어디입니까?

제게 가르침을 주셨던 어느 사진작가분의 영향으로 히말라야는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그건 사진인생의 최종 목표구요, 현재로서는 우포늪에 대한 기록 사진을 계속 찍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 오륙년은 걸릴 듯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나이가 많이 들어 모든 것들에 은퇴를 해야 하는 시점이면 동해를 옆에 둔 7번 국도변 어딘가에 작은 사진카페를 하나 만들어 오고가는 분들과 말벗하며 살고 싶은 게 가장 큰 바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곳으로 오세요. 모여서 사진 찍은 걸 서로 보여주며 놀아봅시다.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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