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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회 최고 스타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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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국 공산당 내 민주화를 선도한 예젠잉이 최근 개막한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1977년 11윌 예젠잉(오른쪽에서 셋째 안경 쓴 이)과 함께 남부 광둥성 광저우시의 당 위원회를 방문한 덩샤오핑(맨 왼쪽)이 현지 간부들과 담소하고 있다. [예젠잉 기념관 제공]

중국 공산당의 최대 행사인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大)의 가장 빛나는 별은 누굴까. 집권 2기를 예약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일까, 아니면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寧)성 서기나 시진핑(習近平) 상하이(上海)시 서기일까.

정답은 의외의 인물이다. 1986년 사망한 예젠잉(葉劍英)이다. 중국 10대 원수(元帥) 중 한 사람인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수호신'이랄 수 있다.

그는 69년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으로 귀양 간 덩과 그의 가족을 막후에서 은밀히 도운 인물이다. 73년 덩이 베이징(北京)으로 복귀했을 때 장칭(江靑) 등 4인방의 제거 작전을 함께 숙의한 사람도 예 원수였다.

화궈펑(華國鋒)이 잠시 집권했을 때 그를 몰아내기 위해 군부의 지지를 덩에게 모아 준 인물도 예 원수였다. 덩 집권의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가 주목받는 현장을 보자. 우선 중국 공산당 당보는 17대 개막 직전 '예젠잉 원수의 민주법제건설에 대한 공적을 찬양하며'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예젠잉 원수의 111주년 탄신을 경축하며'란 이름의 특별 기고도 눈에 띈다.

이뿐만 아니다. 네티즌들은 앞다투어 '예젠잉 사이트'를 만들고, 이곳에 그와 관련된 각종 사진과 찬양문을 올렸다. 대학별로 스터디그룹도 활발하다.

예 원수가 이처럼 새삼 주목받는 이유는 후 주석이 17대에서 과학발전관.정치체제개혁.사상해방 등 당내 민주화를 강조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8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 고위직의 3연임 금지' 조항을 신설했기 때문이다.

'82 헌법'으로 불리는 이 수정헌법은 장기 집권의 싹을 자른, 중국 민주화의 기념비적 쾌거다. 중국의 민주화를 20년 정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헌법으로 인해 그 이후의 국가 지도자급 인사들은 꼼짝없이 연임, 즉 10년간만 재직하도록 제한받게 됐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13년 만에 물러난 것도, 이번 17대가 후 주석의 마지막 집권기간으로 간주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 원수는 덩 집권 직후인 78년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을 맡았다. 전인대는 헌법 수정권이 있는 헌법상 최고 권력기구다. 예 원수는 이 권한을 이용해 헌법 수정에 착수했다. 고위 공직자의 임기 제한 없이는 막힌 인사의 숨통을 트고 당내 민주화를 이룰 수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 원수는 망설이는 덩을 설득해 80년 헌법 수정 작업에 착수했다. 마침내 82년 2월 제5기 전인대 5차 상임위에서 '82 헌법'이 통과됐다. 54 헌법, 69 헌법, 75 헌법에 이은 네 번째 수정헌법이다.

헌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 주석 ▶국가 부주석 ▶전인대 상무위원장 ▶전인대 상무부위원장 ▶국무원 총리 ▶국무원 부총리 ▶국무위원(선임장관 격) ▶최고인민법원 원장(대법원장 격)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검찰총장 격)은 연임(10년)만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82 헌법'에도 문제는 있다. 93조를 통해 중앙군사위 주석은 임기 제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장 전 주석이 국가 주석직을 후 주석에게 넘겨준 뒤에도 2004년까지 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법적 근거다.

네티즌들은 "예 원수는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며 누구도 특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던 지도자"라며 "17대에서 새로 뽑힐 지도부가 예 원수의 가르침만 명심한다면 오늘날 당이 안고 있는 문제의 절반 이상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징= 진세근 특파원

☞◆예젠잉=마오쩌둥 집권 말기 국방부장(장관)을 지내면서 덩샤오핑과 4인방 제거에 합의했다. 그는 신변이 불안한 덩샤오핑을 안전한 광저우 군구로 피신시킨 뒤 현지에서 여러 차례 몰래 만나 4인방 제거 방안을 의논했다. 덩샤오핑을 대신해 그와 친한 천윈(陳雲).리셴녠(李先念) 등과 접촉해 지지세력을 확보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화궈펑의 지지까지 이끌어낸 뒤 10월 6일 정치국 상무위에 참석한 4인방을 체포해 제거했다.

☞◆4인방=문화혁명 기간 중 극좌 모험주의 노선을 걸었던 4인방은 마오쩌둥의 사망을 전후해 권력 강화를 기도했다. 이들은 덩샤오핑을 비롯한 개혁 노선을 걸을 수 있는 정치인들을 걸림돌로 보았다. 그래서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세상을 떠난 직후 인민일보 등을 통해 덩의 실용주의 노선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들은 마오가 사망한 76년 9월 덩 제거 작업에 나섰으나 군부를 업은 덩과 그를 지지한 예젠잉에게 되레 체포돼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덩샤오핑=문화혁명 시기에 공개비난을 받고 밀려났지만, 1973년 3월 마오쩌둥에 의해 부총리로 재기하고 이어 제1부총리와 부주석에 올라 위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76년 후견인이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숨지면서 세력이 기울었다. 그러자 4인방은 집요한 제거 공작을 벌였으며, 76년 천안문에서 저우언라이 추모행사 도중 시위가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그의 모든 직위를 박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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