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87.盧,權대표에 밀려 고향 출마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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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共 정치행보의 첫 걸음이랄수 있는 13대 국회의원 공천,그공천의 특징을 상징하는「5共 거물 탈락」이 결정된 88년3월16일 궁정동 안가.
저녁 무렵이나 돼서야 정치적 사망리스트에 오른 5명중「3명 탈락.2명 공천」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崔秉烈정무수석은 논의의결과를 盧대통령에게 보고해 최종 사인을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권력의 핵심이었던 軍출신 정치인들에 의해 이뤄진 가장 은밀한 의사결정 과정이 일단락된 셈이었다.그러나 적어도「민주화 정부」「민선 대통령」임을 자랑하던 6共이기에,더욱이 5共과의 차별화 이미지 구축에 진력해온 6共이 기에 5共과다를바 없는「軍출신 그룹에 의한 결정적 의사결정 과정」을 드러낼수는 없었다.대신 보다「공식적」인 의사결정의 외양이 필요했던것이다.그것은 黨을 내세우는 방법밖에 없었다.항상 그래왔듯이 당내 민주화가 되어있지 않은 黨이란 민의수렴 창구라기보다 절대권력자의 의지를 민의로 포장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날 모임의 결과가 한단계「보다 공식적인」모임에서 확인된 것은 바로 그날(16일)밤,역시 밀실회의에서였다.당에서 심사한 결과를 盧대통령에게 최종 보고하는 자리.당에서 蔡汶植대표겸 공천심사위원장과 沈明輔사무총장겸 공천심사위간사가 참 석했으며,청와대에서는 주무인 崔秉烈정무수석등이 배석했다.
몇차례 이미 보고를 거쳐 의견조정을 마친 명단이기에 심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서울부터 시작해 순조롭게 진행되던 심사보고가갑자기 경북에서 멈췄다.안동의 權正達,상주의 金相球의원에서 걸린 것이다.
이미 盧대통령 본인이 지시해 군출신 모임에서 별도로 확정까지했음에도 불구하고 盧대통령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대신 안동.상주부분에 이르러『잠깐 기다리라』며 심사를 중단시킨뒤 말없이의자를 옆으로 돌려 앉았다.한동안 침묵이 흘렀 다.
이런 정도면 盧대통령으로서는 분명한 반대의 뜻을 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쉽게 말해 權의원과 金의원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어색한 침묵을 깬 참석자는 대통령의 의중을 이미 알고있던 崔秉烈정무수석이었다 고 한다.
끝내 盧대통령의 입에서 단정적인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렇지만 盧대통령이 의도했던 공천 막바지 뒤집기는 조금씩 단계적으로 공식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權의원은 최후의 순간까지 언급이 없다가 공천결과 발표일(18일)하루 전날 밤,다시말해 석간신문에 權의원의 탈락이 먼저 보도된 다음 黨공천심사위원회에 탈락지시가 통보됐다.
그날밤 沈총장은 공천심사위원들이 합숙해있던 安家 자기방으로 심사위원들을 한사람씩 불러 權의원 탈락을 통보하고동의를 구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막판 뒤집기 공천,개개인의 정치적생사가 엇갈린 대목마다에는 또 나름의 정치적 배경이 없을수 없다.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공천과정에서 나타난 몇가지 의문점을 짚어나갈 필요가 있다.
먼저 정치적 사형선고를 의미하는「공천탈락」으로 대통령의 메모에 적혀있던 5명의 군출신 의원들이 리스트에 올라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1차적으로 공천과정에서 보여주고자 했던「5共과의 차별화」를 위한 희생양들이었다.
다시말해 이들은 5共의 대표라는 얘기다.
權翊鉉의원은 민정당탄생의 후견인이자 5共 전반기 민정당의 대표로 신군부의 정치현장 관리인역을 맡았으며,權正達.李鍾贊의원은민정당창당의 산파이자 5共초 민정당의 살림꾼들이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5共 실력자로서 나름의 정치적 기 반을 가지고 있었다. 金相球의원은 全斗煥대통령의 동서였기에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었다.
나머지 한사람인 裵命國의원 역시 육사14기로 하나회의 중간핵심인 동시에 5共 실력자중 한사람.裵의원은 특히 軍출신 정치인이면서 드물게 사업,그중에서도 정치권력형 이권개입의 소지가 가장 많은 건설회사를 운영해 여러모로 좋지 않은 의 심을 받기에충분했다.
그러면 같은「사망」 리스트에 오르고서도 왜 이들의 생사는 갈렸는가. 공천에서 탈락,정치적 사망의 길로 들어섰던 경우부터 살펴보자.
盧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단호했던 兩權씨는 물론 확실한「5共 거물」이었기에 공천에서 탈락했다는게 중론.그러나 여기에서 兩權씨가 세도를 누릴 당시 미래의 대통령에게 지우기 힘든 자존심의상처를 주었던「괘씸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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