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엄홍길과 함께 까치발로 걷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07년 5월 31일 밤 10시경, 해발 8400m 히말라야 로체샤르 정상에 태극기가 꽂혔다. 한국의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완등한 순간이다.
히말라야에는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14개가 있다. 그 14좌 모두를 처음으로 완등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등산가 라인홀트 매스너. 우리나라에서는 엄홍길 대장이 지난 2000년 세계에서 8번째로 14좌 완등을 기록했다. 그런데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를 기존의 14좌에, 로체샤르와 얄룽캉을 위성봉이 아닌 독립봉으로 포함시켜 16좌로 하자는 주장이 일고 있다. 그렇다면 엄홍길 대장이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한 산악인이 된다.

사람은 흙을 밟고 땅의 기운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엄홍길 대장과의 북한산 산행을 하루 앞두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잠을 설쳤다. 엄홍길 대장에게 북한산은 그야말로 동네 뒷산일 텐데 내가 잘 따라 오를 수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어느새 잠이 들었던지…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다. 전날 하루 종일 흐렸던 날씨 때문에 오늘 비가 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오히려 구름이 햇빛을 가려서 선선한 게 산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오전 11시, 수유동 아카데미 하우스 앞에서 엄홍길 대장을 기다렸다. 먼저 온 사진작가와 잠깐 사진 촬영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 멀리서 구릿빛 얼굴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대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산에서 나누는 인사라 그런가, 처음 본 사이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다. 오늘의 진행 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조금 흥분한 나는 첫 질문이 엉뚱하게 튀어 나왔다. “아침은 드셨어요?” “네, 저는 먹었습니다.” 씩씩한 웃음으로 답한 엄홍길 대장은 내가 아침 전이란 걸 눈치 챘는지 가방을 풀어 내 손에 약과와 한과를 건넨다. 그 손길이 참으로 다정스럽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후, 우리는 천천히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엄홍길 대장은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서울로 이사와 지금의 도봉산 망월사 밑에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도봉산을 제집 드나들 듯 오르내리며 자연스럽게 산과 친해졌고, 그렇게 시작된 산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르게 됐단다. 현재 살고 있는 집 역시, 이곳 북한산 자락과 멀리 않은 곳이다. “한 때는 도심 속으로 들어가 아파트에서 살아보기도 했는데, 사람이 흙을 밟고 땅의 기운을 느끼며 살아야지, 안되겠더라고요.” 결국 다시 산을 찾아 이쪽 북한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자연을 걷는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있음의 증거다

서서히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땅을 걷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산을 오르는 것은 당연히 다르겠지. 하지만 뭐랄까? 숨이 턱까지 차올라 몸은 걸음을 떼기조차 힘든데 머리는 오히려 맑아지는 느낌이다.
“산을 오르는 것, 말 그대로 걷는 게 왜 중요할까요?”
“걷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력이죠. 현대인의 모든 병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즉, 잘 걷지를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인데, 현대인들은 가까운 거리조차 걷기를 꺼려하고 편리만 좇아 자동차를 타고 다니거든요. 본래 걸음을 통해 성장하는 인간이 스스로 걷기를 포기하니 퇴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점차 자연과도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아토피나 정신적 질환처럼 예전에는 없던 희귀병도 생겨난 게 아닐까 싶어요. 한마디로 ‘자연을 걷는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건강의 근원이죠.”
“그렇다면 대장님은 평지를 걷는 것과 산을 오르는 것, 어떤 게 더 좋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산악인이라서 하는 질문인가요?(웃음) 앞에서도 말했지만 ‘걷는 것’ 자체가 좋아요. 다만 산을 오르면 평지를 걸을 때보다 신체의 전반적인 활동력이 배가 되죠. 또 산에서는 자연 그 자체를 마주할 수 있으니까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훨씬 건강해질 수 있죠.”
정말이지 산 속에 들어와 있으니 들리는 건 계곡 물 흐르는 소리와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발소리뿐. 머릿속이 저절로 차분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 이웃이고 친구라더니 마주치는 사람마다 건네는 “수고 많으십니다” “좋은 산행되세요”라는 인사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엄 대장을 알아보고 팬임을 자청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 또한 잇따른다.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올해 12월, 남극대륙의 최고봉에 도전한다

생각보다 고르지 못한 산길에 지쳐서 어느새 앞 사람 뒤꿈치만 바라보고 걷다보니 엄 대장 걸음걸이의 특이점이 눈에 띈다. “대장님, 까치발로 오르시네요?”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엄 대장은 그 사연을 풀어 놓는다.
엄 대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등반은 히말라야 16좌의 마지막 완등지였던 로체샤르가 아니다. 네 번 실패하고 다섯 번 만에 겨우 등반에 성공한 안나푸르나. 그 과정에서 세 명의 동료를 잃었고 엄 대장 자신도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부상을 입었다. 수차례의 발목 수술 끝에 지금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펴지지 않는 발목 때문에 산을 오를 때면 까치발로 오르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실제로 까치발로 걸으면 운동량도 배가 될 뿐 아니라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발달해서 하체가 튼튼해지는 효과가 있어요. 산이 익숙해지면 언제 한 번 해봐요.”
“산을 오를 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에는 어떤 게 있나요?”
“마실 물, 여벌 옷,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는 초콜릿 같은 행동식 등을 준비하면 좋죠. 특히 2개의 스틱을 꼭 사용하도록 하세요. 스틱을 사용하면 팔 근육운동에도 좋고, 등반 시 보다 빠르고 안정감 있게 걸을 수 있어요. 산을 오를 때는 짧게, 내려갈 때는 길게 사용하면 되요.”
어쩐지 스틱을 사용하는 엄 대장의 등반이 훨씬 편안해 보이더라니…. 얼마 못 가서 연신 쉬어대는 나 때문에 결국 처음 목표와는 달리 북한산성까지만 오르기로 했다.
간신히 북한산성에 다다르자 엄 대장은 모자를 벗어 잠시 성곽에 이마를 맞댄다. 이곳의 기운을 느끼고 받아가려는 의미란다. 그래서 물었다.


“대장님께 있어 산은 어떤 의미인가요?”
“전생에 내가 산 또는 산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산은 곧 내 인생이자, 내 존재 가치를 깨닫게 하는 위대한 스승이죠.”
그는 대답과 함께 이미 산과 하나인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북한산성에서 잠시 앉아 얘기를 나누자니 여기저기서 엄 대장을 알아본 사람들의 사인 요청이 쇄도한다. 배낭이며 수첩이며…일일이 정성스레 사인을 하는 그 모습에서 산의 넉넉함이 묻어난다. 사과 한 조각을 나눠 먹고 기념촬영까지 마친 우리는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단숨에 이뤄졌다.
올해 12월 중순경,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등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엄홍길 대장. 세계 최고봉인 히말라야의 16좌를 완등하고도 아직도 뭔가 이룰 것이 남은 걸까? 아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그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기도 한 산과 완벽한 일체를 이루면서.

최경애 객원기자 doongjee@joins.com
사진_다리 스튜디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