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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대오른토초세>1.여론 내세워 태어난 私生兒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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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2의 土超稅는 다시 없어야 한다-.토초세 파문을 계기로 정부의 정책입안 행태.토지 정책.지도자의 자질.여론의 실체 등에대한 전반적인 반성이 일고 있다.情緖에 휩쓸리는「感情 입법」,양산되는「지키지 못할 法」,수요.공급의 원리를 무시한 채 稅制로만 풀려는 토지정책,흔들리는 조세질서등 어느 하나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 이번 토초세 파문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다시는 토초세같은 愚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토초세가 남긴 교훈을 하나하나 되짚어 본다.
[편집자 註] 土超稅의 첫번째 교훈은 합리적이고 전문가적인 판단과 논리에 따르지 않고 분위기와 여론을 의식해 만들어지는 법이 언젠가는 반드시 시장경제원리와 자본주의.법치주의와 상충되면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재무부 실무자들은 土超稅가 애초부터 違憲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었다. 당시 세제실에서 실무작업을 맡았던 K씨는『노는 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현금 부담 능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매기는 것은 위헌소지가 있다는 소신을 여러번 밝혔으나 이미 土超稅를 만들기로 한 정부(청와대)의 방침을 바꾸기에는 역 부족이었을 만큼 분위기가 사뭇 경직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文熹甲 경제수석이 이끄는 청와대 팀은 土超稅를「개혁의 상징」으로 포장하면서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라야 할 정책결정을 여론 정치하듯 다룬 것이다.마침 국토개발연구원이「상위 5%의 계층이 전체 사유지의65.2%를 소유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투기를 막고 토지소유 편중 현상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자 본주의 질서에어긋나더라도 강도 높은 토지공개념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그대로 밀어붙여졌다.
갤럽의 여론 조사도 토초세의 입법에 이용됐다.
「국민의 90%가 토지공개념제도를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를 정부는 모든 비판을 묵살한 채 토초세를 밀어붙이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청와대는 또 土超稅로 대표되는 토지공개념을「경제민주화」로 연결시켰고 이를 반대하면「반개혁」또는 「보수」로 몰아붙였다.
당시 盧泰愚대통령도 마찬가지여서 盧대통령은 土超稅를 비롯한 토지공개념을「돈 많고 땅 많은 사람들이 세금 좀 더 내도록 하는 제도」쯤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언론도 그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한 몫 했다.
지금와서 憲裁의 결정을 지지하고 있는 언론도 당시에는 土超稅에 시비를 걸면 옳고 그름을 떠나 「땅가진 자의 대변인」이나「수구세력」쯤으로 매도하기 일쑤였다.
與小野大 속 야당의 정치공세도 土超稅의 입법을 거들었다.당시民主黨과 平民黨은 논리를 따지기에 앞서 정부안에 반대하는 民正黨을 反개혁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와 함께 재무부.기획원등 경제부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土超稅가 만들어진 데는 내무부의 정치논리도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당시 재무부.기획원은 경제논리에 따라 과표현실화를 통한 綜土稅가 부동산투기를 막는「正攻法」이라고 보고 내무부의 협조를 구했으나 지방의회선거를 앞두고 조세저항을 걱정한 내무부는 복지부동이 아니라 아예 「搖之不動」이었다.
李春九장관의 정치적 비중 때문에 경제부처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당시를 기억하는 한 경제관료의 술회다.
金榮珍당시 내무차관은 한술 더 떠『과표현실화및 綜土稅의 강화는 국가안보상 곤란하다』고 까지 거듭 반대했다.
言路가 막힌 이같은 경직된 분위기 아래서 토초세는 지상명령이되었고 일단 방향이 정해지자 경제부처의 실무자들은『土超稅는 법률적으로 말해 「긴급 피난적 조치」며 일종의「정당방위적」 행위』라고 자위했다.
심지어 일부 실무자들은 사유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느냐는 반론에대비하기 위해 존 스튜어트 밀.헨리 조지등 토지의 公共개념을 강조한 일부 자유주의 철학자들의 책을 다시 읽어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토초세는 논리적인 기반을 얻을 수 없었고,5년뒤에 사실상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 토초세의 「事必歸正」은 비단 정책입안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여론을 형성했던 우리 모두에게 값비싼 교훈이 아닐 수 없다.
〈南潤昊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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